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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유림의 영수 기우만, 망국의 한을 '호남의병열전'에 담다
홍순권 2014-06-19 14:42:00 3748

제8회 호남유림의 영수 기우만,
망국의 한을 ‘호남의병열전’에 담다.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기우만은 의병을 해산한 뒤 두 차례나 국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먼저 1906년 3월에 올린 상소에서는 단발령을 철회한 이후 애초에 단발을 주장했던 자들의 죄를 묻지 않은 것과 구제도를 복구하였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개화정책이 그대로 시행되고 있는 점을 비판하였다.

이와 더불어 의병을 일으킨 사람들을 처단하거나 체포하는 것과 자신에게 뜻밖의 누명을 씌워 체포령을 내린 것에 대해서 부당함과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기우만은 상소를 서울로 올라가 직접 전달하려 하였으나, 곳곳에 포교가 깔려 있어서 포기하고 말았다.

5월에 올린 두 번째 상소에서는 창의 전후로 세 번이나 올린 소장에 대한 비답(批答)이 없는 것은 언로가 막힌 탓임을 비판하면서, 창의의 정당성을 재차 밝혔다. 그러나 이 상소의 말미에 기우만은 간신이 전횡하여 충성을 바치려 해도 바칠 길이 없으므로 임금이 환궁하기를 기다리며,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산으로 들어가 은거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기우만은 그 해 9월 장성군 진원면 삼성산(三聖山) 골짜기에 삼산재(三山齋)를 짓고 들어가 시를 지으며 울분을 달랬다. 이때 ‘삼산구곡(三山九曲)’과 ‘가훼악부(嘉卉樂府)’란 시를 지었다. 이듬해 고종이 환궁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그 뒤 1900년 조정에서는 신기선의 천거로 기우만에게 중추원 의관을 제수하고 주임관(奏任官)에 임명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부터 기우만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비각 증수 때 상량문을 써주고, 하동군 악양정(岳陽亭)에서 김굉필(金宏弼)과 정여창(鄭汝昌)을 배향할 때 축문을 써주는 등 글 짓는 일로 세월을 보냈다.

나이 59세 되던 해인 1904년 11월 기우만은 광주 주흥동(朱興洞)으로 이사했다. 이듬해 관찰사 이도재(李道宰)가 향약을 설치하고 기우만을 도약정(道約正)에 앉히려 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한편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켜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11월 을사오적을 앞세워 을사늑약을 불법적으로 체결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기우만은 곧 바로 을사오적을 처단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이 무렵 전국 각지에서 유림들의 상소가 빗발치듯 조정에 날라 들었으나 모두가 한낱 휴지나 다름없이 되어버렸다.

그 때 마침 최익현과 정재규 두 사람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노성(魯城, 현 충남 논산지방)에서 강회(講會)를 가질 터이니 협조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기우만은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대신 제자 정시해(鄭時海)를 보냈다. 최익현은 이 강회에서는 선비들이 경기도 진위(振威) 향교에 모여 서울로 올라가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투쟁하자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최익현의 호소는 일제의 감시망 때문에 실현되지 못하였다.

또 1906년 정월에 정재규가 기우만을 찾아와 서로 의논 끝에 여러 동지들과 함께 곡성 도동사(道東祠)에 모이기로 계획을 세웠으나, 중간에 저해하는 자가 있어서 계획을 취소하였다.

을사늑약이 알려지자 원주 제천 방면에서는 유인석의 문인 원용팔(元容八)이 앞장서 의병을 일으킨 다음 호응을 요청하는 글을 보내왔다. 최익현은 전북 태인의 임병찬(林炳瓚)과 더불어 창의 계획을 세우고 1906년 4월 실행에 옮겼다는 소식도 들렸다. 그러나 최익현은 거의 직후 곧 바로 체포되어 서울로 이송되었다가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한 때 최익현과 거사를 논의하기도 했던 기우만은 그 해 여름 단신으로 상경하여 상소를 올리기 위해 집을 나섰다. 육로는 감시가 심해 바닷길로 가기 위해서 무안까지 내려갔으나, 거기서도 감시가 심해 포기하고 말았다. 기우만은 당시 호남의 명유이었던 만큼 일제의 감시가 심했다.

을사늑약 이후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키자는 논의가 무성했으나 그다지 성과가 없던 참에 1906년 가을 광양의 산중에서 은거하던 전 주사 백낙구(白樂九)가 먼저 일어섰다. 백낙구는 수백 명의 의병을 이끌고 순천으로 진격하려 했으나 이 기미를 알아 챈 지방관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해서 1913년 전라남도 경무과에서 작성한 기밀문서인 <전남폭도사(全南暴徒史)>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06년 11월 4일(양력) 본도의 유생으로서 본디 최익현을 따르는 광양군의 백낙구, 장성군의 기우만, 창평군의 고광순·이항선(李恒善) 등이 관제개혁으로 실직한 전(前) 군리(郡吏) 등과 통모하여 구례군 중대사(中大寺)에 모여 총원 50여 명이 총기 10여 정을 가지고 다음날 5일에 거사하였다. 이들은 구례를 출발하여 광양군을 통과하여 7일 순천에 이르렀는데, 무슨 생각에서인지 다시 구례로 돌아갔다가 그들 중 백낙구 외 수명이 그곳 군수에게 체포되었다.”

실제로 기우만이 구례에서 백낙구 등과 거사를 모의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당시 일제는 기우만을 구례 의병 사건의 공모자로 지목하고 있었던 것 같다.

백낙구를 체포한 왜경은 관련자 수사에 나서 그 해 음력 10월 16일 기우만을 광주군 갈전리(葛田里)에서 체포했다. 이튿날 기우만은 광주경찰서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았다. 왜경은 기우만이 배후에서 백낙구의 창의를 사주한 것으로 간주하고 사실을 실토하라고 압박하였다. 이에 대해서 기우만은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백낙구의 창의로 말하면, 그는 먼저 내 마음을 알았다 하겠는데 의(義)는 대단하나 군사가 적어서 실패했으니 사랑스러워도 도울 길이 없다. 그러나 사람은 비록 망해도 의는 망하지 않을 것이니 그 기절(氣節)은 참으로 추앙할 만하다. 무릇 의가 같으면 마음이 같고, 마음이 같으면 가르치지 않아도 가르친 것과 다름없고, 시키지 않아도 역시 시킨 것과 같다.”

당시 기우만은 흰 갓(白笠)을 쓰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명성황후 인산(因山) 이후 10년 동안을 쓰고 다닌 갓이었다. 그는 흰 갓을 쓰고 다니는 이유에 대해서 왜경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다.

“춘추전(春秋傳)에 적을 토벌하지 못하면 장사(葬事) 일자를 쓰지 않고, 장사 일자를 쓰지 않으면 상복을 벗지 않는다고 되어 있는데, 지금 나라의 원수도 갚지 못한 채 어찌 감히 대중들처럼 검은 갓(黑笠)을 쓸 수 있겠는가?”

20일에도 왜경은 또 다시 심문을 개시하였으나, 끝내 혐의를 밝히지 못하자 결국 기우만을 석방하였다. 왜경은 백낙구와 기우만간의 공모를 확신하고 있었으나 기우만의 자백을 통해 그 증거를 찾아내지는 못했던 것이다.

해가 바뀌고 기우만의 나이 62세가 되던 1907년이었다. 두문불출하고 지내던 중 고광순, 김상기(金相琦), 이항선이 기우만을 찾아왔다. 이들은 지난해 기우만과 더불어 거의하기로 의논을 정하였는데, 순천에서 패한 것을 보고 복수와 함께 부끄러움을 씻을 계책을 서로 물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새로운 계획은 마련되지 않았다. 전북 태인에서 일어났던 최익현과 충남 홍주에서 일어났던 민종식(閔宗植) 등이 지난 해 이미 체포된 지 얼마 안 된 터여서 의병세력은 잠시 정세를 관망하며 그 활동이 주춤하던 때였다.

다른 한편으로, 그해 3월 서울에서는 이른바 을사오적을 암살하기 위한 계획이 세워졌다. 낙안의 나인영(羅寅永)을 비롯하여 창평의 이광수(李光秀), 구례의 이기(李沂), 광주의 최동식(崔東植), 장성의 기산도(奇山度) 등은 자신회(自新會)를 결성하고 암살단을 조직하였으나 을사오적의 암살은 미수에 그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때 암살단의 일원인 강상원(康相元)이 군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을 저격하여 가벼운 부상을 입힌 채 체포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기우만은 다시 영광경찰서에 붙잡혀 들어갔다. 체포된 강상원의 입에서 기우만의 이름이 나왔기 때문으로, 왜경은 이 사건이 기우만이 시켜서 한 짓인지를 캐물었다. 이에 대해서 기우만은 을사오적은 죽어서 마땅한 인물들이라고 지적하면서도 배후 혐의에 대해서는 시인하지 않았다.

왜경은 기우만을 일단 광주경찰서로 압송하여 재차 심문을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성과를 얻지 못한 왜경은 기우만을 서울로 압송하기 위해서 목포로 끌고 내려갔다. 3월 28일 광주를 출발하여 4월 1일 목포경무서에 도착했다. 목포에서 하룻밤 지낸 후 기우만은 배로 압송되어 인천을 거쳐 4월 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서울에서도 강상원과의 관계에 대한 심문이 계속되었다. 이에 대해 기우만은 혐의를 부인하면서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어떠한 모의를 막론하고 그 사람을 확실히 안 다음에야 더불어 꾀할 수 있는 법인데, 나를 끌어댄 자가 나를 모른다는 것은 그 진술을 보면 이미 명백하다. 그렇지만 오적은 만세의 죄인이니 과연 역적을 죽이려 했다는 것을 죄로 삼을진대 나는 마땅히 그 괴수가 될 것이다.”

왜경은 마침내 강상원을 불러내 기우만과 대질심문을 하였다. 그러나 기우만을 마주 본 강상원이 “그 분인 것 같다”는 어정쩡한 대답으로 얼버무림으로써 왜경은 끝내 기우만의 혐의를 입증하지 못 했다. 마침내 기우만은 서울에서 수감된 지 꼭 보름만인 4월 20일 풀려났다.

집으로 돌아온 기우만은 두문불출하며 지내다가 죽기 전 의병장 기삼연을 비롯하여 김준·전수용(전수용) 등 13명의 의병 활동과 공적을 담은『호남의사열전(湖南義士列傳)』을 찬술하였다. 나라가 망하기 직전까지 호남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의병들의 항일투쟁에 관해서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바를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1916년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후손들은 그를 순창 무이산(武夷山) 기슭에 묻고, 고산서원에 배향하였다.

■ 참고문헌
- 송사집(독립운동사자료집 3, 1971 수록)
- 호남의병장열전(독립운동사자료집 2, 1971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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