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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에서 거의한 기우만, 나주에서 호남대의소를 창설하고 광주향교 광산관에 집결하다
홍순권 2014-06-19 14:41:00 4751

제7회 장성에서 거의한 기우만,
나주에서 호남대의소를 창설하고 광주향교 광산관에 집결하다.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1986년 2월 장성에서 기우만 등이 창의할 무렵 나주에서도 의병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왕비시해 사건과 단발령으로 반일 감정이 한층 고조되어 있던 터에 나주관찰부 참서관(參書官)주1)으로 있던 안종수(安宗洙)의 주도하에 개화파 관료들이 순검을 동원하여 성내 주민들의 상투를 강제로 잘라내자, 양반 유생은 물론 민중과 이속들의 불만이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주1) 참서관은 1895년 내정개혁의 일환으로 추진된 지방제도 개혁에 따라 동년 윤 5월 1일부터 23부제가 실시되면서 신설된 직제이다. 각 부의 장관으로 관찰사를 두었는데, 참서관은 부 관찰사 다음 서열로 부관찰사(副觀察使)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23부제는 1년만인 1896년 8월(양력)에 폐지되었고, 8도를 조금 보완한 13도 체제로 행정구역을 다시 재편되었다.

바로 이 때 장성의 기우만이 각 고을로 보낸 격문과 홍주의 통문이 도착하자, 나주의 유생과 향리들이 창의 준비를 서둘렀다. 마침내 나주의 유생 이승수(李承壽) 등이 중심이 되어 전 주서(注書) 이학상(李鶴相)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나주의병에는 유생 뿐 만 아니라 향리들도 주도적으로 참여였는데, 향리층 가운데 의진 결성에 중심적 역할을 한 인물은 나주의 서리로 갑오농민전쟁 당시 농민군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정석진(鄭錫振)이었다.

근왕을 창의의 목적으로 내세운 나주의병은 우선 개화에 대한 반대 입장과 안종수의 잘못을 낱낱이 기록하여 국왕에게 상소하였다. 이어서 나주의병은 다른 지역의 의병과 통합을 시도하거나 연합에 노력하였다. 특히 기우만이 이끄는 장성의병과는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며 통합을 시도하였다. 이 때 나주의 상황을 전해들은 기우만은 새로 결성된 나주의병진에 글을 보내 격려하면서 안종수에 대해서 10가지 죄목을 들어 성토하였다. 기우만이 지적한 안종수의 10가지 죄목은 개화당에 아부한 죄, 각 읍의 인신(印信)을 도용한 죄, 주민을 핍박한 죄, 향교를 철폐하려 한 죄, 단발로 문묘에 참배한 죄 등이었다. 기우만의 통문을 읽은 나주의병들은 곧 바로 안종수를 제거하였다.주2)

주2) 종전에는『송사집』>의 기우만 연보를 근거로 안종수가 피살된 다음 기우만이 나주에 글을 보냈다고 하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홍영기 교수에 의하면, 이 연보는 기우만의 문인들이 그의 스승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작성한 것으로 안종수의 피살과 관련해서는 기우만 자신이 쓴『정장군전』과 이병수가 직접 목격하고 기록한『금정정의록』의 기록이 더 믿을 만 하다고 판단된다.

기우만의 장성의병은 근왕북상을 위하여 나주에 내려와 제반 문제를 협의하려 했으나 나주의병은 이에 선뜻 동의하지 않았다. 그 후 기우만이 안종수를 단죄하는 통문을 보낸 후에 나주의병과 관계가 가까워졌다. 그리하여 장성의병은 결성된 지 4일 만인 음력 2월 11일 기우만은 고광순, 기삼연, 김익중(金翼中), 이승학(李承鶴), 이주현(李周鉉), 고기주(高琦柱), 양상태(梁相泰), 기동관(奇東觀), 기동준(奇東準), 기재(奇宰), 기동로(奇東魯) 등 노사학파의 의사들과 함께 의병 200여 명을 거느리고 나주로 이동하였다. 이로써 나주의병이 출범한지 하루 만에 나주향교에 두 의진이 집결하게 되었다.

나주에서 조우한 두 의병진은 임란 때 유명한 의병장이었던 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의 사당에 나아가 제문을 바친 다음, 단을 쌓고 금성산을 향해 나라를 위해 적을 토멸할 것을 맹세하였다. 때마침 나주에는 내려와 있던 승지 박창수(朴昌壽)가 향교를 찾아와 이들의 거의를 치하하고 송사 기우만을 호남대의소 대장으로 추대할 것을 제안하였다.

호남대의소 대장으로 추대된 기우만은 이 사실을 열읍에 통보하는 한편, 거의(擧義) 사실을 국왕에게 상소하였다. 이 상소에서 기우만은 의병 해산을 위한 선유사의 파견이 국왕의 본의가 아니라 자신들의 화를 모면하기 위한 개화파의 농간이라고 주장하고, 또 안종수가 흉계를 부리다가 군중의 손에 죽었다는 사실을 고하였다. 물론 이 상소는 임금 전에 올라가지 못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명망 있는 인물을 선유사로 특별 임명하여 의병들을 회유하여 해산시키려 하였다. 그리하여 1896년 음력 정월 신기선(申箕善)을 남로(南路)선유사, 이도재(李道宰)를 동로(東路)선유사로 각각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신기선은 선유 활동을 위해 남하하던 중 한 때 제천의병에게 붙잡혀 감금 당하기도 하였다.

기우만은 각 고을에 통문을 돌려 시국을 구제하는 일이 급함을 재삼 설득하며 2월 30일(음력)을 기해 일제히 광주로 모이도록 하였다. 광주를 집결지로 정한 것은 광주가 호남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나주의병진에서는 호남의병의 총수격인 기우만이 나주에 머물러야 한다고 간청했으나 듣지 않았다. 광주로 이동한 기우만은 광주향교인 광산관(光山館)에 본영을 설치하였다. 당시 참모였던 기삼연도 광주로 진영을 옮기는 것을 지지했다.

기삼연은 기우만의 재종숙이었으나 나이는 5세 아래였다. 그는 기우만이 나주에 머물 때 백마를 타고와 사람들이 백마장군이라고 불렀다. 또 기우만이 광산관에서 회합할 때도 장성에서 의병 3백명을 규합하여 가장 먼저 도착하였다. 그 부대의 사기가 정명(精明)하고 군기가 엄하여 사람들이 참 의병이라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기우만이 광산관에 유진하고 있을 때 노응규가 지휘하던 진주의병을 해산시키는 데 성공한 친위대장 이겸제(李謙濟)가 전라도 서남부지역으로 진출했다. 나주 참서관 안종수의 동생 안정수의 사주를 받은 이겸제는 전라도에 들어서자 먼저 정석진을 찾았다. 그를 참서관 안종수를 살해한 주모자로 지목하여 처단하기 위해서였다.

정석진은 갑오농민전쟁 때 나주 관리로 있으면서 나주목사 민종렬(閔鍾烈)과 힘을 합해 나주성을 지키는데 공을 세웠다. 이 일로 인해 그는 해남군수로 발탁되었다. 민종렬은 담양군수로 자리를 옮겼다가 음력 1895년 11월 말(양력 1월) 면직되었다.

정석진과 민종렬을 체포한 이겸제는 중간에 사람을 넣어 뇌물을 바치면 살려줄 수 있다고 유혹하였으나 정석진을 이를 거부하고 죽음을 택하였다. 그는 임지에서 체포되어 나주로 끌려와 효수되었다. 이 때 광주향교의 재임(齋任)을 맡고 있던 박원영(朴源永) 또한 전주진위대에게 참변을 당하였다. 그가 광주향교를 기우만이 이끄는 의병의 집결지로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형세가 이렇게 돌아가자 창의하고 나서 뚜렷한 계책을 세우지 못하고 공론만 되풀이하던 의병진 내부에서는 차츰 동요의 빛이 떠돌기 시작했다. 때 마침 남로선유사로 임명되어 지방을 순회하고 있던 신기선이 2월 27일 전주에 도착하여 기우만에게 사람을 보내 은근히 설득하였다. 신기선이 선유한 내용은 대체로 이러하였다.

주상께서는 비밀 유시를 내려 의병을 권장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지금 세력을 잡은 자들의 협박하는 구실만 되고 있다. 주상께서는 그 때문에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어 환궁할 날을 기약할 수 없게 되었다. 공들이 의병을 일으킨 것은 어가(御駕)를 받들어 모시고 돌아가 임금의 치욕을 씻으며 왜를 토벌하고 원수를 갚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임금과 신하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호령이 통하지 않고 역적의 무리가 총명을 옹폐하여 성상의 뜻도 펼 수 없게 되었으니 오늘의 명령은 정말 부득이한 일이다. 성상의 뜻을 받들어 군사를 해산하는 일이 또한 충성을 다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신기선은 갑신정변 때 이조판서 겸 홍문관제학으로 개화당 정권에 참여하여 고흥 여도(呂島)에서 10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다가 갑오개혁 때 다시 등용되어 김홍집 내각의 내부, 법부, 학부대신 등을 역임하였다. 이 일로 신기선은 한때 유림들의 배척을 받기도 했지만 단발 일부 개화정책에 반대하여 개화파 인물들로부터 비난을 산 일도 있어서 친일파로 인식되기 보다는 완고파로 인정되어 보수적 유림으로부터도 신망을 지니기도 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신기선의 은근한 설득을 받은 기우만은 마침내 의병 해산을 결심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심중을 털어놓았다. 1896년 음력 3월 초, 양력 4월 20일 경이었다.

지금 세력을 잡은 무리들의 마음이 음험하고 불측하니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이러한 염려가 있다면, 적을 토벌한다는 것이 도리어 우리 임금의 화를 재촉하는 일이 될 것이다. 차라리 자수하여 각자 뜻을 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이에 대해서 기삼연 일부 참모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기우만은 마침내 통곡하며 의병을 해산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독립신문 1896년 5월 2일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지난 달 스무 나흔 날(4월 24일) 전라도에 간 대대장 이겸제씨가 군부에 한 보고에 장성 기산림(奇山林)의 손자 기우만은 이왕 경향간 명망이 있는 이라, 본도 의병들을 영솔하였더니 향자(向者; 접때) 대군주 폐하의 칙교로 선유하옵심을 보고 하는 말이 위에서 불안해 하옵심이 심히 황송하다 하고 의병들을 보고 급히 돌아가 그 직업을 편안하라 한다더라.”

이로써 호남 일대에서 의병 활동은 사실상 막을 내리고 이후 의병세력은 그 자취를 감추었다. 매천야록에는 기우만이 정석진의 처형을 보고 의병을 해산하고 몸을 피했으나 붙잡히지 않았는데, 이는 신기선의 비호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기우만과 기맥을 통했던 민종렬 또한 서울로 압송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겨우 목숨을 구했다.

■ 참고문헌
- 송사집(독립운동사자료집 3, 1971 수록)
- 금성정의록(錦城正義錄) 병편(丙編), (독립운동사자료집 3, 1971 수록)
- 호남의병장열전(독립운동사자료집 2, 1971 수록)
-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일조각,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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