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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만,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키다
홍순권 2014-06-09 14:40:00 4573

제6회 기우만,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키다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기우만은 1846년(헌종 12년) 8월 장성군 탁곡(卓谷; 현 황룡면 아곡리)에서 태어났다. 기우만은 여덟살 때 중국 초나라 때 제갈량이 쓴 출사표 같은 어려운 고문을 이해했으며, 열세살 때는 자치통감과 주자강목을, 그리고 16살 때에는 주역, 예기, 춘추 등을 독파했다고 한다.

기우만은 25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29세 때 증광과(문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이후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가 살았던 곳이 황룡면 하사촌(下沙村)이었는데, 30세 때 고진원(古珍原)의 창촌(倉村)으로 이사했다가 다시 진원면 월송리(月松里)으로 이사하면서 호를 송사(松沙)라고 지었다. 하사와 월송에서 한자씩 따서 지은 것이다.

그의 나이 34세 때인 1879년 조부 노사 기정진이 별세하였다. 기정진이 타계하자 그는 승중손(承重孫)인 춘도(春度)를 대신하여 상(喪)을 주관하였다. 2년 뒤 1881년 여름에 조부 기정진의 유문(遺文)을 편사(編寫)하였고, 1883년 봄에는 이를 <<노사집(蘆沙集)>>으로 묶어 편찬하였다. 그 사이 1882년 8월 익릉참봉(翼陵參奉)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기우만은 오직 조부의 유업을 계승하는 일에 열중하였으며, 특히 기우만에 의한 노사문집의 발간은 그의 학문적 명성을 더욱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양회갑이 편찬한 노사 기우만의 행장에 따르면 1884년 그는 경상남도 삼가(三嘉) 물계(勿溪)로 정재규를 방문하고 단성의 신안정사에서 강회를 가졌으며, 돌아오는 길에 진주 월횡(月橫)에 들러 조성가를 방문하였다. 또 1889년 가을에는 능주로 가서 정의림을 방문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던 해 겨울에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이 찾아왔다. 척양척왜의 만인소를 올렸다가 유배까지 당한 김평묵과 기우만이 서로 뜻이 맞은 것이다. 당시 화서학파의 종장으로 김평묵은 1881년 신사척사운동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신안군 지도에 귀양갔다가 풀려나 돌아가던 길이었다. 김평묵이 귀양 중이었을 때 그의 사위인 홍재구(洪在龜)를 통해 기우만이 문집을 보낸 것이 인연이 되어 두 학파간에 주리론적 연대의식이 생겨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기우만은 재야에 뜻을 두고 강학을 열어 제자를 키우는 한편, 정재규, 정의림 등 노사학파의 핵심 인물과의 관계를 긴밀히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화서학파의 인물들과 교유하면서 노사의 학통을 뿌리내리는 일에 힘을 쏟았다. 그 결과 영남과 호남간의 노사학파의 단결이 더욱 공고화되었고, 노사학파 내에서 기우만의 위상도 크게 높아졌다.

그러던 중 1894년 전봉준을 지도자로 내세운 호남의 동학농민들이 이른바 ‘갑오농민전쟁’을 일으켰다. 호남 전역에서 탐관오리와 악덕 지주와 양반에 대한 숙청이 일어나는 내전을 방불하게 하는 혁명적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기우만 집안과 그가 사는 동네는 한 사람도 피해가 없었다. 그만큼 기우만 집안은 유생들은 물론 지역의 농민층 내에서도 명망 있는 집안으로 인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우만은 ‘난리’를 평정하기 위해 내려온 관군에게 군량과 고기를 모아 보내고 동학당의 숙청을 요청했다. 이듬해까지도 ‘동학도’는 뿌리가 뽑히지 않았다. 전라도관찰사로 내려온 이도재(李道宰)는 고민 끝에 기우만에게 편지를 내고 진압책을 물어왔다. 이도재는 갑신정변 때 관련되어 고금도에 유배되었다가 갑오경장으로 풀려나 동학란 진압의 특지를 받고 내려왔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기우만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괴수는 잡아 섬멸할 것이며, 협박에 못이겨 동원된 사람들은 너그러이 용서하여 은의(恩義)를 베풀어주어야만 그들이 스스로 잘못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동학란’의 만연을 막는 방도입니다.”

척사파의 영수였던 노사의 정신을 계승한 기우만이 동학 또한 서학과 마찬가지로 악의 뿌리로서 척사의 대상이라고 인식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나주에서 동학농민군의 진압에 공을 세운 나주목사 민종렬(閔種烈)의 공덕을 기리는 ‘나주평적비’를 찬(撰)하였다.

그러나 일본을 등에 업은 개화파정권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고, 개화정책을 강행하면서 정국은 더욱 혼미에 빠져 들었다. 1895년 8월 일본이 왕비를 시해하는 무리수를 둔데 이어 친일개화파 세력이 국왕을 협박하여 단발령을 공포하자, 분노한 백성들이 의병의 깃발 아래 ‘토역복수(討逆復讐)’를 외치기 시작했다. 강원도 춘천에서는 이소응이 의병을 일으켜 관아를 휩쓸었다. 해가 바뀐 1896년 1월의 일이었다.

이소응의 거의와 때를 맞춰 충청도 홍주에서 김복한 등이 일어섰고, 경상도 평해에서도 평민 출신 신돌석이 의병장이 되어 반일항쟁의 기치를 올렸다. 충청도 제천 유생 유인석, 이인영, 이강년 등이 전국에 창의(倡義) 격문을 띠우자 이에 호응해 맹영재(孟英在), 김백선(金伯善)이 지평(砥平)에서, 허위가 금산(金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정부에서는 선유사(宣諭使)를 각도로 보내 의병을 선유하여 해산하고, 백성을 안무하도록 했다. 한편으로는 서울, 지방의 병력과 일본 수비대 병력까지 동원하여 무력으로 제압하는 강온 양면 작전을 펼쳤다. 그러나 의병들은 이들 선유사가 갖고 온 칙명이 역신들이 왕명을 빙자하여 만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선유사를 붙잡아 처단하기도 하였다.

제천에서 의병장으로 추대된 유인석이 2월 11일 각도 별읍에 보낸 격문이 장성에도 도착하였다.

“아아, 우리 팔역(八域)의 동포들이여! 지금 온 나라가 모두 죽게 된 이 판국을 그대로 버려둘 것인가? 할아버지, 아버지 그 누구도 5백년 조정 이 나라의 백성 아닌 자가 없는데 나라를 위해서나 집을 위해서나 어찌하여 한 두명의 의사도 없단 말인가? 참으로 슬프도다....․(중략)...국모의 원수도 이가 갈리는데, 참혹함이 더 하여 군부의 지존에 또 형체를 헐리고 의관이 찢어지는 일을 당하였도다.(하략)”

유인석이 각도 별읍에 격문을 낸 시점에 서울에서는 새로운 사태가 발생하였다. 즉, 1896년 2월 11일 이른 새벽. 신무문(神武門) 밖에 러시아 군사 50명의 호위 하에 교자 4대가 준비되어 있었다. 때 맞춰 고종과 왕세자, 엄상궁 세자빈 등이 나와 가마에 올랐다. 왕을 맞이한 이는 이완용(李完用)과 이범진(李範晉) 등 친러파 대신들이었다. 가마가 옮겨간 곳은 러시아 공사관이었다. 새벽이 되자 국왕을 도둑맞은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이윽고 김홍집(金弘集) 등 대신들에게 러시아 공사관으로 오라는 고종의 소환장이 들이닥쳤다.

왕명에 따라 별도리 없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향하던 내각 대신들의 행렬은 도중에 군중의 피습을 받았다. 가장 먼저 피습을 당한 것은 정병하(鄭秉夏)의 가마였으며, 이를 본 조의연(趙義淵), 유길준(兪吉濬)은 일본군 막사 안으로 급히 몸을 피하였다. 김홍집은 러시아공사관으로 향하던 중 경무청 경무사의 칼을 맞아 숨을 거두었고, 그의 시신은 종로네거리로 끌려가 수일동안 방치되었다. 탁지부대신 어윤중(魚允中)은 서울 탈출했으나 그의 고향인 충청도로 가다가 용인에서 피습, 살해되었다.

아관파천 이후에도 의병들의 항일투쟁은 계속되었다. 일본인에 대한 가해가 심해지고, 일본 앞잡이로 지목된 관리들이 여기저기서 살해되었다.

을미사변이 일어난 뒤부터 창의를 미루고 지내던 기우만은 유인석의 격문이 도달하자 마침내 창의할 결심을 했다. 유인석의 격문이 오기 전부터 기우만은 이미 여러 고을에 통문을 보내 세력 규합에 나섰다. 그는 격문을 통해서 국모의 원수를 갚지 않을 수 없는데 간신들이 개화를 빙자하여 단발까지 강요하니 이 이상 더 왜적의 횡포와 군주를 위협 강제하는 무리들을 좌시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기우만은 또한 단발을 하면 망하고 상투를 보호하면 산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소들은 친일내각에 의해 막혀 왕에게 이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러고 있던 차에 유인석의 격문이 오고 각처에서 의병 궐기의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1896년 2월 7일경 기우만은 분연히 일어서서 호남의 각처 유생들에게 격문을 보냈다.

“임금께서 피난을 하고 계시는데 시일만 헛되이 보낼 수 없도다. 역당들은 숨어버려 아직 그 뿌리가 뽑히지 않고 있다. 어안의 한줄기 눈물자국은 천만백성이 간뇌도지(肝腦塗地)하여도 속죄할 수 없고, 임금의 몇 걸음 파천 길은 억조 백성이 분골쇄신하여도 돌이키지 못할 것이다....”

격문에서처럼 기우만의 장성의병의 봉기는 다른 지역보다 늦게 고종의 아관파천 직후 결행되었다. 격문에서 말하는 역당이라 함은 김홍집내각 일파와 그에 동조하는 개화파 세력을 말하는 것으로 그 중 김홍집과 정병하, 어윤중 등은 분노한 백성들에게 맞아죽었지만, 나머지 세력은 여전히 제거되지 않고 있었다. 국왕이 외국 공사관에 피신한 것 또한 백성으로서 차마 두고 볼 수 없는 치욕이었다. 따라서 기우만은 군사를 일으켜 그 잔당을 숙청하고 서울로 올라가서 러시아 공사관에 파천해 있는 임금을 궁중으로 모셔다 보호하는 일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였다.

■ 참고문헌
- 송사집(1931)
- 松沙先生文集拾遺(1980)
- 김봉곤, 호남지역의 기정진 문인집단의 분석, 호남문화연구 44, 2009
- 김동수, 의병열전, 전남일보 1976. 11. 23.~1976.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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