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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자 집안에서 자라 기독교 청년이 된 기산도
홍순권 2014-12-15 14:53:00 4573

제17회 유학자 집안에서 자라 기독교 청년이 된 기산도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기산도는 일명 경(慶)으로 1878년 10월 16일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에서 유학자인 식재(植齋) 기재(奇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 진도가 빨라 종조부인 양연과 삼연으로부터 다른 아이들보다 더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기산도의 아버지 기재도 노사의 학풍을 잇는 행주 기씨 가문의 젊은 선비였지만, 그의 종조부인 양연, 학연, 관연, 삼연과 11촌숙인 기우만은 당대에 호남에서 잘 알려진 유학자들이었다. 이러한 가학적(家學的) 분위기에서 자란 기산도 또한 어려서부터 유학자로서의 학문적 소양을 착실히 키워나갔다.

기산도는 16세 때인 1893년 녹천 고광순의 고명딸과 결혼하였다. 고광순은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아버지인 의병장 고경명과 함께 순국한 고인후의 종손이다. 고광순의 장흥 고씨 가문도 창평은 물론 호남 일대에서 으뜸가는 명문가군에 속하였다. 고광순은 학식과 덕망으로 이름 있는 선비였으며, 젊어서 기정진의 문하로 들어가 기우만, 기삼연 등과도 일찍부터 교분이 두터웠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직후 기우만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그는 기삼연과 함께 기우만 의병진에 가담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직후에도 그는 기우만을 찾아가 거사를 모의한 일이 있으며, 마침내 1907년 1월 창평에서 독자적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고광순이 이처럼 의병에 뜻을 두게 둔 데는 임진왜란 이후 이어져 온 호남 의병의 명문가로서의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과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항일 의병정신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기삼연과 더불어 을사늑약 이후 호남지역 의병운동의 선도적인 역할을 했던 고광순은 1907년 10월 지리산 피아골에서 일본군과의 격전 끝에 순국하였다.

일찍부터 장성의 행주 기씨 가문과 평소 왕래가 잦았던 고광순은 기재의 아들인 산도의 영특함과 사람됨을 알아보고 진즉부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고광순의 사위가 된 기산도는 장인인 고광순으로부터 적지 않은 정신적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기산도가 결혼한 이듬해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고, 그 다음 해 조선의 왕비(명성황후)가 일본 낭인 무리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단발령이 공포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격변과 일련의 사건을 계기로 전국에서 의병세력이 들불처럼 일어나자 장성에서도 기우만 등이 뜻있는 선비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기우만은 2백여 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이학상을 중심으로 의병세력이 결집되어 있었던 나주로 진출하였다.

이때 기산도의 아버지 기재도 고광순, 기삼연 등과 함께 기우만의 의병부대에 가담하였다. 아버지 기재는 기우만과 10촌지간으로 두 사람 모두 노사 문하에서 동문수학을 한 사이였다. 기재는 기우만의 ‘호남대의소’의 참모에 임명되어 광주에 나아가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조정의 해산령에 의해 기우만이 의병부대가 해산하자 그와 함께 아곡리 집으로 돌아왔다.

이른바 ‘을미의병운동’이 점차 누그러지기 시작할 무렵인 1896년 4월 서재필을 비롯한 젊은 개화파 인사들은 독립신문을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독립신문을 발간한 서재필은 7월에 이르러서는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우리나라의 자주와 내정개혁을 표방하고 나섰다. 척사의병의 가풍 속에서 유학을 공부하며 장성한 기산도는 이때부터 서울을 오가며 독립협회에 가입하는 등 젊은 지식인들과 교제하면서 점차 개화사상에 눈을 떴다.

또 이즈음 기산도는 장성에서 박인호(朴寅浩), 이기(李綺) 등과 ‘자강회’를 조직하여 자주권의 회복과 국력 신장을 표방하며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 활동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각주1) 그러나 유학을 공부했던 그가 어떤 연유로, 누구의 권유에 의해서 서울에 올라가 개화인사로 변신하였는지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각주 1) 기산도가 1896년 10월 장성에서 자강회를 조직했다는 사실은 김동영 기자가 쓴 <<전남일보>> 1977년 7월 8일자 <의병열전>에 의거한 것이다. 그러나 기산도의 자강회 설립에 대한 전거를 밝히지 않고 있어서 사실 여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매천야록에서 황현은 기산도가 약관의 나이에 삭발하고 사관생도가 되어 이근택의 집에 출입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정말 육군무관학교의 생도였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또 1906년 재판기록에 의하면 이근택 암살 거사 당시 그는 기독교인으로 표시되어 있다.각주2) 이처럼 을사오적 암살단에 가담하기 전까지 기산도의 행적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신비스러운 행적이 많다.

각주 2) 조소앙, <<遺芳集>>(1940)의 <기산도전>에는 기산도를‘호남의 유자(湖南儒者)’라고 적고 있어서, 기산도가 실제로 기독교인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한다.

아무튼 을사늑약 직전에 기산도는 상동교회에 드나들며 청년지도자들과 함께 뜻을 같이 하면서 상동교회 부속기관으로 젊은 민족운동가들의 집합소 역할을 한 상동청년회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상동청년회는 1904년 한일의정 체결 이후 일본의 국권 침탈에 반대하고 미구에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일본과의 보호조약 체결을 막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 방안을 숙의하고 있었다.

기산도는 동지들과 함께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망국적 ‘한일조약’ 체결에 협력한 친일매국대신들을 처벌하기 위한 투쟁을 추진하였다. 그 일환으로 1905년 10월 중하순경(음력 9월 旬間)에 기산도는 상동청년회의 중추 인사인 정순만, 이동녕의 지시 하에 친일인사 처단을 행동으로 옮기려 하였다. 그가 처단 대상으로 정한 이들은 이지용, 이근택, 이하영, 박용화 등 이른바 4간(奸)이었다. 그는 10월 8일경 신문(新門) 밖에서 열린 국민교육회의 연회장에서 이들을 격살할 것을 모의하고, 동지 손효경으로 하여금 은밀히 가서 관찰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 연회에는 이하영만 참가하고 다른 거물급 친일파들은 오지 않았다. 이에 기산도는 “이하영 한 놈 죽이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고 말하고 거사를 포기하고 말았다.각주3)

각주 3)「판결선고서」 <<국권회복운동판결문집>>(총무처 정부기록보존소, 1995), 118~119쪽

1905년 11월 17일 ‘을사오적’을 앞세워 일제는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작성 제시한 이른바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였다.(을사늑약) 을사늑약의 소식이 알려지자, 이에 반대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11월 20일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시일야 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써서 울분을 표시하였고, 11월 30일에는 전 탁지부대신 민영환이 자결하는 등 일본과 친일파의 만행에 항거하는 죽음을 무릅쓴 투쟁이 줄을 이었다.

기산도는 매국노 을사오적을 처단할 궁리를 하던 중 이종대의 집에서 김석항을 만났다. 김석항은 1905년 8월(음력)에 유약소를 설립하고 정부와 외국 공관에 장서를 보냈던 인물이었다. 기산도는 김석항의 지원을 받아 단도 3자루와 육혈포 1정을 매입하고 이동(泥洞) 한광국(韓光國) 집에서 숙식하면서 김석항과 함께 결사대인 오적암살단을 조직하였다. 오적암살단의 단원에는 기산도와 김석항을 비롯하여 김일제, 김성초, 김필현, 박종섭, 박경하, 박용종, 손성원, 송효철, 송창영, 안한주, 이근철, 이종대, 이태화, 정재헌, 현학표 등이 참여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매국노를 죽이는 것보다 그 부형을 죽이는 것이 매국노의 예기를 꺽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먼저 이근택의 아버지 이민승을 죽이기로 하였다. 이 계획은 김일제가 먼저 제안한 것이었으나, 일의 실행은 기산도가 주도하였다. 기산도는 11월 23일 밤에 김성초, 송창영, 이근철, 이종대, 박종섭, 박경하, 안한주 등 7인과 함께 각각 칼과 총, 쇠망치를 들고 이민승의 집에 잠입하였다. 김성초가 먼저 집안으로 들어갔고 나머지 사람들은 밖에 서 있다가 어떤 사람이 급히 달려 나감에 일이 발각된 줄 알고 돌아와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각주4)

각주 4) 기산도 등 판결선고서

한편 이즈음 또 을사오적을 규탄 처단하기 위한 또 하나의 흐름으로 각 도의 청년회 대표들이 중심이 된 상동교회의 모임이 조직되었다. 기산도도 참여한 이 모임은 김구와 전덕기 목사를 비롯하여 정순만, 이준, 이동녕, 최재학, 계명륙, 김인집, 옥관빈, 이승길, 차병수, 신상민, 김태연, 표영각, 조성환, 서상팔, 이항직, 이희간, 전병헌(왕덕삼), 유두환, 김기홍 등이 함께하였다. 이 모임의 회의 결과 상소를 올리기로 결정하고 이준이 상소문을 지었으며, 제1회 소수(疏首)는 최재학으로 정하고 그밖에 네 사람을 더하여 5인이 신민(臣民)의 대표 명의로 서명하였다. 이들 다섯 사람이 먼저 상소하고, 이들이 사형되면 다시 다섯 사람씩 계속해서 상소 투쟁을 벌일 작정이었다.각주5) 상소문에는 조약의 무효화와 함께 조약에 서명한 대신들을 대역죄로 처형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각주 5) 김구 저(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193~195

상소문에 서명한 최재학, 김인집, 신상민, 전석준, 이시영 등 5인은 11월 27일 오후 3시경 을사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이른바 신조약에 대한 변명서(對所謂新條約卞明書)’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행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즉시 대안문(大安門)각주6) 앞에 나아가 엎드려 상소를 올렸다. 이 때 일본 순사와 헌병들이 다수 몰려와 위협하며 결박하려 하자, 이들은 크게 꾸짖으며 “우리들이 대한국민으로 대한국의 독립을 위하다가 교활하고 사악한 너희들의 칼날에 원혼이 될지언정 어찌 포박을 감수하겠느냐”라고 항의하였다.

각주 6) ‘대안문(大安門)’은 1906년 4월 25일‘대한문(大韓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러자 일본 헌병들이 군도로 이들을 난타하였다. 격분한 이들도 맨 주먹으로 대적하였으나, 한층 더 난폭해진 헌병들이 검봉(劍鋒)으로 마구 난타하는 바람에 이들은 온몸에 상처를 입었다. 이때 이 광경을 지켜보던 400~500명의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자, 2개 소대 병력의 일병들은 군도를 좌우로 휘두르며 성난 군중의 접근을 막고 상소자 5명을 결박하여 경무청으로 끌고 갔다. 상동교회 모임에 참석했던 기산도도 당연히 군중 속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상소자들은 일병에 끌려가면서도 군중들을 향해 ‘사수독립’을 외쳤다.각주7)

각주 7) <<대한매일신보>> 1905년 11월 29일 ‘死守獨立’/‘최재학 등 제씨 疏本이 여좌함; 동 신문 1905.12.30. ’諸氏發起‘)

이처럼 상소투쟁과 시위를 지켜보면서 합법적인 방법으로 매국노를 처단할 길이 없음을 확신하게 된 기산도와 그의 동지들은 애초에 마음먹었던 대로 을사오적을 직접 처단하는 것만이 이제 남은 유일한 선택이라고 생각하였다.

<참고문헌>
- <<대한매일신보>> 1905년 11월 27일 ~ 동년 11월 29일자.
- <판결선고서>, <<국권회복운동판결문집>>(총무처 정부기록보존소, 1995)
- 황현, <<매천야록>>(국사편찬위원회, 1971)
- 김동영, <의병열전, 의사 기산도>, <<전남일보>> 1977년 7월 6일~동년 7월 12일자.
- 김상기, <기산도의 항일의열투쟁>, <<백범과 민족운동 연구>> 4, 2006.
- 오영섭, <<한말 순국·의열투쟁>>,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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