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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월산성 전투와 기삼연의 죽음
홍순권 2014-11-07 14:52:00 3809

제16회 추월산성 전투와 기삼연의 죽음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신년 1월 하순 기삼연은 호남 일대에 배일격문을 돌리고 아울러 일본인 관민(官民)의 목에 현상금을 걸고 병사들과 주민들의 항일투쟁을 독려하였다. 그러나 한 겨울 추운 날씨에다 구정이 가까워 오면서 군사 활동이 한층 어렵게 되었다. 기삼연 또한 거동이 불편하였다.

그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새 은신처를 찾아 그 일생의 마지막 전장이 될 담양 추월산성으로 들어갔다. 성 주변 험한 산세가 믿을 만하여 이곳에서 설을 맞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밤이 깊어가자 뜻하지 않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노숙하는 병사들의 옷은 젖어 추위를 견딜 수가 없는데다 끼니조차 걸어 굶주린 상태였다.

이 때 수비의 허술함을 틈타 일병들이 기습 공격을 가해 왔다. 1908년 1월 29일 밤이었다. 일병들이 의병군을 바로 뒤따라 온 탓에 미처 싸움에 대비할 겨를 도 없었다. 공격을 시작한 적병들은 총을 요란하게 쏘아댔다. 의병군은 죽음을 무릅쓰고 힘을 다해 대항하였다. 전투는 밤새 계속되었다. 이때의 전황을 김용구의「의소일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날이 밝자 기삼연과 더불어 김용구, 유인수(柳寅壽), 김익병(金益秉) 등은 힘을 합쳐 적병과 종일토록 싸웠다. 적은 계속해서 응원병을 보내와 그 수효가 엄청났다. 총을 맞고 죽은 자 엄청나게 많았다. 아군 또한 죽은 자가 30여명이나 되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적이 먼저 퇴각하였다. 아군 또한 부대를 이동하여 추월산성 아래 현양동(見陽洞)에 진을 쳤다.”

기삼연의 마지막 격전지였던 추월산성 전투에 대해서 일제측은 두 가지 기록을 남겨놓았는데, 이 때 일병 측의 피해도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 중 경찰이 작성한「전남폭도사」는 다음과 기록하고 있다.

“1월 30일 거괴 기삼연이 이끄는 4백의 ‘비도’(의병에 대한 일제의 비칭)가 담양군 용면(龍面) 성문리(城門里, 현 산성리)를 점령하고 곧 담양을 습격하려고 함에 주재소 순사가 광주에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순창수비대와 협력해서 기선을 제압, 즉각 성문리의 적을 공격하여 궤란 시켰다. 적의 사망자 23, 부상자 30이다. 노획물은 화승총 5정이며, 야마니시(山西) 일등졸(一等卒)이 부상하였다.”

또 다른 전투 기록인 광주수비 제2대대 요시다(吉田) 소좌의 전보 보고는 다음과 같다.주1)

“어제 30일 오전 5시부터 순창수비대 시마자키(島崎滿明) 군조 이하 7명은 담양의 서남 1리에서 기삼연이 솔하는 적 4백과 충돌하여 오후 3시까지 전투하여 30여명을 죽이고, 소 20두와 기타 수종의 물품을 노획하였다. 일등졸 마야니시(山西勝四郞)는 오른쪽 대퇴부에 관통총창(貫通銃創)을 입어 중상이다. 적의 대부분은 서북 백양산 방향으로 궤주한 것 같다. 내일 2월 1일 이마무라(今村) 중위의 1대(隊)를 해지(該地) 방면으로 파견하려 한다.”

주1)「진중일지」(일본군 보병 제14연대 편), 1908년 1월 31일자. 동 1908년 2월 5일자에 수록된 순창수비 제7중대 中條 소위의 보고 내용은 전과 사실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월 29일 오후 8시 담양 남방 약 1리에 적 수백이 집합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시마자키(島崎) 군조 이하 6명을 파견하였는데, 30일 오후 7시 귀래 보고는 좌와 같다.
<1> 담양으로 전진 도중 담양군성산(潭陽郡城山)(순창 서방 약 3리 반, 담양 동북방 약 1리 반 ; 추월산성을 지칭함) 산정에 봉화를 발견함에 따라 동지로 향해 전진함
<2> 30일 오전 8시 城山에 적 약 4백 집합해 있음을 발견하고 곧장 이들을 공격하여 전투 6시간 반의 후 총검 돌격하여 격퇴함. 적은 서방으로 도주함
<3> 차 전투에서 적의 전장에 유기한 사체 23(내 左翼隊長 및 六隊長을 포함함), 부상자 50을 내려가지 않을 것. 노획품 말 1두, 소 10두 한전(韓錢) 2관 8백문, 총 15정, 화약 5근, 기타 잡품 다수.
<4> 아군 부상 1, 소모한 탄약은 580발이다.

이상의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당시 일병 측에서는 담양군 주재소 경찰 병력과 인근에 주둔해 있던 순창수비대 병력이 합동으로 참가했음을 알 수 있다. 광주수비대에 지원을 요청한 이마무라 토벌대는 추월산성 전투가 종료된 이후에야 도착하였다.

캄캄한 밤안개까지 짙게 깔려 피아가 서로 분간할 수 없는 상황을 이용하여 무사히 성을 빠져 나와 현양동에서 진을 친 기삼연은 이튿날 다시 행군하여 순창군 복흥면 사창리로 진을 옮겼다. 기삼연은 부상당한 발의 환부가 악화되어 더 이상 행군이 불가능했다. 이곳에서 기삼연은 휘하 부장들을 불러 모으고 군무를 통령인 김용구에게 일임한다고 선언하였다. 부장들은 만류하면서도 결국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이제 발을 다쳐 종군하는 것이 불가능하니, 군무의 전권을 그대에게 맡기노니, 부디 신중히 임무를 다하여 나라의 원수를 갚아주기를 바라오. 또 칼과 인장을 주며 말하기를 그대의 경륜과 지략은 이미 내가 아는 바이니 무엇을 더 바라리오라고 하였다.”

김용구는 눈물을 흘리며 기삼연으로부터 칼과 인장을 받았다. 이들과 헤어진 기삼연은 순창 구수동(九水洞 순창군 복흥면)에 있는 재종제(再從弟) 구연(九衍)의 집에 머물렀다.

1908년 2월 2일 설날이었다. 기삼연이 막 아침상을 받고 숟가락을 드는 순간이었다. 일병 20여 명이 돌입하여 기삼연을 내놓으라며 주인에게 총칼을 들이대고 위협하였다. 기삼연은 순순히 나서서 그들의 오랏줄을 받았다. 당시 기삼연을 체포한 것은 광주수비대대장(보병 제14연대 2대대장) 요시다(吉田勝三郞)의 명령을 받고 추월산성에 도착하였다가 전투가 종료된 것을 인지하고 곧 바로 기삼연의 뒤를 밟고 따라온 이마무라(今村順吾) 중위의 휘하 부대였다.

이 날 선봉장 김준 부대는 창평 무동촌(無童村)에서 요시다가 파견한 가와미츠(川滿希建) 조장이 이끄는 일본군 토벌대와 싸워 토벌대장 가와미츠와 부하 2명을 죽이고 1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날 길에서 기삼연의 체포 소식을 듣게 된 김준은 승전의 여세를 몰아 광주로 호송 중인 기삼연을 구출하기 위해 정병 30여 명을 선발하여 이끌고 달려 왔다.주2) 김준은 기삼연을 구하러 담양 애교(艾橋)를 거쳐 광주 경양역(景陽驛)까지 추격했으나 기삼연은 이미 수감된 뒤였다.

주2)「성재 기선생 거의록 약초(권3)」에서는 김준이 무동촌에서 적장 요시다(吉田)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착오에 의한 것이다.「진중일지」(일본군 보병 제14연대 편)에 의하면 당시 김준부대와 교전한 적장은 가와미츠조장(川滿曹長)임 명백하다.

기삼연이 담양에서 붙잡혀 광주로 실려 가는 모습을 본 연도의 주민들 가운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튿날 1908년 2월 3일 기삼연은 광주 사장(沙場 현 광주공원 앞에서 적에게 피살되었다. 일제가 기삼연을 이처럼 재판 절차도 없이 즉결 처형한 이유에 대해서 종손인 기광도(奇廣度)는 일본군 토벌대장이 선봉장 김준에게 살해당한 것에 대한 분풀이였다고 해석하였다.

추론컨대, 이밖에 날로 높아가는 호남의병의 항일 투쟁의 기세를 꺾기 위한 의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두 가지 요인 모두 작용했을 것이다.

기삼연의 처형 소식을 들은 광주부중은 애도를 표하기 위해 수일동안 불을 때지 않았다고 한다. 또 설인데도 불구하고 부녀와 아이들은 화려한 의복으로 거리에 나오지 않아 친척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 같았다고도 한다. 그만큼 호남지역 항일의병의 수장을 잃은 광주 민중들의 슬픔은 컸던 것이리라.

기삼연은 죽기 직전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出師未捷身先死, 谷日腹年夢亦虛
출사미첩신선사, 곡일복년몽역허

싸움터에 나가 이기지 못하고 먼저 몸이 죽으니,
일찍이 해를 삼킨 꿈은 또한 헛것인가.

어머니의 태몽을 상기한 이 시에는 일제와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한 기삼연의 한과 슬픔이 짙게 묻어난다.

기삼연의 시체가 그대로 광주천에 버려져 일인들에게 갖은 수모를 당해 수습마저 어려웠으나, 광주 선비 안규용(安圭容)이 관을 준비해와 광주 서쪽 탑동(塔洞)에 장례를 지내고 “호남의병장 기삼연”이라 새긴 목비(木碑)를 세웠다고 한다.주3) 뒷날 기산도가 기삼연의 묘를 장성군 황룡면으로 옮겼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기삼연의 공을 기리어 그에게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주3) 오준선이 쓴「의병장 기삼연전」에는 안규용이 광주 서쪽 탑등(塔嶝)에 기삼연을 장례하였다고 했으나, 탑등은 탑동의 오기인 듯하다. 종손 기광도가 쓴「성재공행록」에는 종손 기산도가 서울에서 내려와 광주 서쪽 탑동(塔洞)에 기삼연의 시신을 묻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기삼연의 사후에도 일본군은 호남지역의 의병세력을 진압하기 위해서 더욱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대규모의 토벌작전을 감행하였다. 특히 창평 무동촌 전투에서 김준에게 크게 패한 일제는 김준·김율 형제의 의병부대를 진압하는데 전력을 쏟았다. 기삼연에 의해 당겨진 항일투쟁의 횟불은 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더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1908년 2월 5일 대구에 본부를 둔 한국 주둔 일본군 남부수비관구사령관 츠네요시(恒吉忠道)는 광주지역 인근의 호남의병을 진압하기 위한 특별 명령을 제14연대장 키구치(菊池主殿)에게 하달한다. 이 작전의 요지는 연대장이 직접 대구수비대의 보병 2소대 및 공병 1분대(하사 이하 12명)을 이끌고 오는 7일 대구 출발 가능한 한 속히 광주에 도착하여 해지 부근의 각 수비대를 함께 지휘하여 의병을 소탕하라는 것이었다. 작전 기간은 3내지 4주간이며, 정황에 따라 목하 전라남도 부근에서 행동하고 있는 ‘기병중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특별히 허가하였다. 이에 따라 제14연대 연대장을 필두로 연대본부 제1중대, 공병 1분대와 함께 기병 1개 중대, 그리고 광주수비대대로 구성된 대규모 토벌대가 편성되었다.주4)

주4)「진중일지」, 1908년 2월 5일자.

이리하여 한일강제병합의 전주곡인 ‘의병학살’의 광풍이 무신년 벽두부터 호남일대에 다시 세차게 불기 시작하였다.

<참고문헌>
-「성재 기선생 거의록 약초(권3)」
-「의소일기」
-「진중일지」(일본군 보병 제14연대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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