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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포, 장성 공격과 백양사 약사암 전투
홍순권 2014-10-06 14:51:00 4001

14회 법성포, 장성 공격과 백양사 약사암 전투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이남규를 체포한 일본군은 고창읍 점령을 보고 받고 출동한 고부수비대 제6중대 소속 스스무(進) 소위 이하 35명의 부대원이었다. 이들은 고창성을 점령 중이던 의병들이 자신들의 공격을 받고 퇴각을 결정하자, 퇴각하는 의병대원들을 추격하던 중 이남규를 체포하였다.

스스무 소위는 이남규를 심문한 결과 고창읍 내습 당시 의병의 총 병력은 50명이었고, 기삼연의 지휘 하에 이진사(이철형), 김유성, 이대극 등이 가담하였으며, 11월 1일 고창분파소를 습격하여 무기를 약탈하고 일본인 2명을 살해했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이남규는 그 날 밤 군아에서 잠을 자던 중 일본군의 습격을 받고 도주하던 중 성벽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해 체포되었던 것이다.주1)

주1) <진중일지> 1907년 11월 15일자「고부수비제6중대장 중원대위 보고의 요지」 참조. 또 <진중일지> 1907년 11월 12일자 전과 보고에 의하면 고창 전투에서 일본군은 적 2명을 죽이고, 10여명을 부상시켰으며, 화승총 10정을 노획하였다고 하였다.

이후 일병들은 의병의 고창읍 내습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영광군 관동 이진사의 가옥과 동군 수각동(水閣洞) 이진사 아버지의 가옥, 동군 마촌면 남산리 이대극의 가옥, 동군 마촌면 남산리 김유성의 가옥을 불태웠다.주2)

주2) <진중일지> 1907년 11월 23일자

고창읍성 전투 후 기삼연은 장성 수연산으로 되돌아왔다. 여기서 대오를 정비한 뒤 진을 다시 백양사로 옮기었다. 백양사로 돌아온 기삼연은 김준 등과 더불어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고 전열을 가다듬으며 새로운 전략의 수립에 고심하였다. 기삼연 등은 여러 지역에서 의병이 일어나 함께 호응해주기를 기대했으나, 그렇지 못한 상황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또 훈련이 되지 않은 병사들을 대부대로 운영하는 것도 기동성이 떨어져 무모하다고 판단하였다. 결국 기삼연과 김준은 의병부대를 서로 나누어 분산, 활동하기로 결정하였다. <후석유고>주3)에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성재가 준과 상의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의병을 일으킨 지 수 월이 되었는데도 서로 호응하여 일어나는 자가 없으니 그대는 부하 군사를 거느리고 영광. 나주. 함평. 무안 등지로 가서 사림들을 설득하고 움직여서 군무(軍務)를 장하게 하라. 나는 장성, 순창 등지로 가서 의병을 모집할 터이니, 우리가 서로 호응하면 적을 반드시 쳐부술 수 있으리라.”

주3) <후석유고(後石遺稿)>는 후석(後石) 오준선(吳駿善 1851~1931)이 남긴 글을 그의 조카 오동수가 1934년 후석의 문인들과 함께 간행한 문집이다. 오준선은 노사 기정진의 문인으로 한말 일제시기 호남의 대표적인 유학자 중 한 사람으로서 호남 의병장에 관한 여러 편의 전기(의병전)와 의병 활동에 관한 다양한 기록을 남겼다. <후석유고>는 1991년 경인문화사에서 <후석선생문집>의 이름으로 영인하였다.

기삼연은 김준 등과 회합한 뒤 마침내 영광을 공략할 계획을 세웠다. 당시 영광에는 수백 섬의 쌀이 모아져 있었고 이것은 법성포를 통해 일본으로 운송된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12월 5일 기삼연부대는 영광읍 공격을 위해 수각산(水閣山)에 이르렀으나 영광은 일제 측의 수비가 삼엄하였다. 마침 쌓아두었던 쌀도 법성포로 운반돼 그 길로 계획을 바꿔 말머리를 법성포로 돌렸다. 야밤중에 기습을 받은 법성포 주재소의 보조원들은 반격조차 제대로 못하고 도망하고 말았다. 기삼연 등 의병들은 병기를 회수하고 일본인이 사는 집 여러 채를 모두 불살라버렸다. 또한 일본으로 운반키 위해 쌓아둔 창고를 열어 곡식을 주민들에 나눠주었다. 이 사실을 <전남폭도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고 있다.

“12월 7일 오후 13시 기삼연이 이끄는 약 70명의 비도가 법성포를 습격해왔다. 사건이 돌발적인데다가 야밤중이어서 주재소 보조원도 응전할 겨를이 없어 허둥지둥 급히 피신했다. 주재소 건물과 재류방인(일본인) 가옥 7동, 그리고 가구 물품이 모두 불에 타 없어졌고, 방인 1명이 실수하여 익사했으며, 조선인 1명이 부상당했다. 영광주둔 수비대장 이하 14명이 20리를 추격하였으나 종적을 알 수 없었다.”주4)

주4) <진중일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12월 8일 불효(拂曉) 폭도 약 백명이 법성포를 습격한다. 상보(狀報)를 득하고 오전 3시 출발 토벌을 위해 하사 이하 14명을 솔하고 법성포로 급행하여 오전 7시 도착했으나, 적은 작야 12시 경 일본인 가옥에 불을 놓고 오전 2시 지나 무장 방향으로 돌아간 뒤여서 곧장 이를 추적했으나 마침내 그 행방을 알수 없다. 오후 7시 귀대함.”

법성포에서 회군한 기삼연은 장성 백양사에 진을 치고 곧 바로 장성읍을 공략할 계획을 세웠다. 마침 장성읍내 일본인들의 횡포가 심하다는 보고를 들어왔기 터였다. 그리하여 기삼연은 사람을 보내 하사리(下沙里)에 살고 있는 중형 양연(亮衍)에게 이러한 뜻을 알렸다. 형 양연이 물심양면으로 기삼연의 활동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즈음 고창전투에서 흩어졌던 포수들이 다시 모이고 기타 병기도 고창의 관리와 읍민들에 의해 백양사에 은밀히 반입되었다.

12월 9일 한밤중 백양사 쪽에서 함성소리와 말발굽소리가 요란했다. 이날 의병부대는 장성분파소를 소각하고 우편국을 강타, 파괴해 버렸다. 또 우편소장 남베(南部龍五郞)을 처형했다.주5) 남베는 의병의 기습에 놀라 부엌으로 도망 아궁이 속으로 기어들어가 의병군에게 발각되어 처형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주5) <전남폭도사>에는 12월 7일 장성읍내에서 10리 떨어진 곳에서 전 장성우편취급소장 남베(南部龍五郞)가 기삼연의 부하 40명에게 총살당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기삼연 장성읍 공격 일자는 <진중일지>의 기록이 훨씬 자세하고 구체적이며 여러 차례 반복되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진중일지>의 12월 9일이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장성읍 전투가 있었던 그 날 오후에 기삼연 의병부대는 광주에 주둔하고 있던 또 다른 와 일본군 부대와 큰 전투를 치렀던 보인다. 일본군의 <진중일지>에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와타니(岩谷) 참모장 호위를 위해서 광주에 이른 하야시 군조(林軍曹) 이하 수명은 귀도 중 12월 9일 오후 4시 장성 남방 약 2천 미터 지점에 달했을 때 약 150명의 ‘폭도’와 만나 교전하여 약 20분 후 이들을 격퇴하였다. 적은 오동리(梧洞里)를 거쳐 그 반은 동북방으로 그 반은 동남방으로 흩어졌다. 일행은 이들을 추격했으나 해가 지면서 종적을 잃어버렸다. 이 전투에서 적이 버리고 간 사체(死體) 13(제1대장 이윤화李允化, 제4대장 김문행金文行을 포함), 노획품 화승총 11, 화약, 철환 약간. 금건(金巾) 1 반(反), 망토 1매, 죽망제(竹網製)모자 6개, 잡품 십수 점(이상 소각)이다. 우리 측의 손해는 없고, 전투 중 소비한 탄약은 326발이다. 장성우편국장은 이 ‘폭도’들에 의해 참살되었다.”주6)

주6) <진중일지> 1907년 12월 19일자

이튿날 광주 주둔 수비대의 지원을 받은 장성의 일병들은 곧 바로 기삼연 의병부대를 추격하기 시작하였다. 기삼연은 장성 기습 후 일단 진을 삼서면(森西面)으로 옮겼다가 다시 백양사로 돌아왔다. 그러나 일병의 추격은 집요해서 백양사에 미처 군진을 풀고 재정비도 하기 전에 기습을 당했다. 12일 불효에 일병들이 백양사에 기습 공격을 감행해 왔던 것이다. 이 때 기삼연은 백양사 양 계곡에 포대를 설치하고 일병과 대치하였다. 백양사에 잠입하던 일병과 의병 사이에 치열한 교전이 있은 끝에 일병들은 퇴각하였다. 이 때 의병 측과 교전한 일본군 보병 제14연대 제8중대 소속 요시다(길전) 특무조장은 당시의 전투 상황을 보면,주7) 그 때 있었던 전투의 치열함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주7) <진중일지> 1907년 12월 21일자. 또 <진중일지> 동년 12월 28일자에 의하면, 12월 11일 장성 백양산 약사암 전투에서 승리한 공로를 인정받아 8중대 특무조장 요시다 이하 16명이 일본군 보병 제14연대장 키쿠치(菊池主殿)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1> 12월 10일 오후 3시 반, 대대장으로부터 지난 밤 장성을 습격한 ‘폭도’ 백여 명을 소탕하라는 명령을 받고 하사 이하 15명을 인솔하여 오후 5시 출발하였다. 동일 오후 11시 30분 장성에 도착했더니 적은 이미 도주한 후여서 여러 곳으로 밀정을 보내어 11일 ‘폭도’들이 샛길로 빠져나가 백양산에 집합해 있음을 알아냈다.

<2> 12월 11일 오전 10시 장성을 출발하여 덕치(德峙)를 거쳐 약수정에 이르러 토인(土人)으로부터 ‘폭도’는 70~80명이며 무기를 휴대하고 백양산 약사암(藥師庵)에 있음을 알아내고, 그곳으로 급히 진격하였다. 오후 4시 30분부터 약 40분간 3면에서 이들을 공격했으나 원래 약사암은 단애절벽의 바위 위에 있어 적은 이 곳 천험(天險) 요새를 사수하였다. 마침내 일몰에 이르러 야습하기로 결정하고, 백양산을 우회하여 적의 좌측배(左側背)를 공격하여 오후 10시 약사암을 점령하였다. 적의 일부는 순창 방향으로 일부는 정읍 방향으로 흩어져 도주하였다. 적이 버리고 간 사체 10, 부상자 불명이나 12명을 내려가지 않는다. 아군의 손해는 없다. 소모 탄약은 450발이며, 노획품은 총 10정과 탄약 및 화약 약간(소각함)이다.

전해오는 바로 이후 일병은 백양사에서 승려 한 명을 붙잡아와 심문 끝에 당시 일본군과 교전한 의병대장이 기삼연임을 알아내고, 그의 형, 기양연을 일병부대 군막으로 불러 취조하면서 기삼연의 행방을 캐물었으나 끝내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한 채 결국 양연을 방면하고 말았다고 한다.

백양사마저 적에 의해 기습을 당하고 패퇴한 기삼연은 그 진을 입암산성(笠岩山城)으로 옮기고 여러 부장들과 논의 끝에 중대 단안을 내렸다. 즉 의병부대를 소단위로 나눠 유격전을 펴기로 한 것이다. 이로써 호남창의회맹소 의병부대는 각자 소규모 부대로 나뉘어 함평, 광주, 장성, 담양, 고창, 무안 등으로 분산하였다.

참고문헌
- <성재선생 거의록> 외.
- <후석유고>
- <의소일기>
- <전남폭도사>
- <일본군 제14연대 진중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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