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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읍성 전투(1907년 10월 31일 - 11월 1일)
홍순권 2014-10-06 14:51:00 3483

제13회 고창읍성 전투(1907년 10월 31일~11월 1일)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문수사 전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인물이 있다. 김준(金準)이다. 김준의 자는 태원(泰元), 호는 죽봉(竹峰)으로 나주군 문평면 북동리 갈마지(渴馬池)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24세 되던 해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일시 동학농민군에 가담하기도 했었다. 을사늑약 이후 김돈(金燉) 등과 거의를 도모하던 중 기삼연의 거의 소식을 듣고, 동지 10여 명과 함께 문수사로 찾아갔다. 이 날 김준은 기삼연을 만나 허심탄회하게 장차 의병투쟁의 방략과 군무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그러던 중 가을비가 내리는 어둠을 틈타 몰래 잠입한 일병들의 기습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기삼연은 김용구, 김엽중(金燁中), 김익중(金翼中)으로 하여금 전투 준비에 나서게 했는데, 뜻밖에도 그 날 야간 전투에서 새로 찾아 온 김준이 큰 공을 세웠다. 갑작스런 적의 기습으로 의병들이 크게 당황하자 김준은 앞으로 나서며 다음과 같이 큰소리로 의병들을 고무시켰다.

“의병이라 이름하고서 적을 만나 도망하는 것은 계책이 아니다. 더욱이 험한 산길에서 살아나기를 바랄 수도 없으니 기왕 죽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싸우다 죽는 것이 나지 않겠는가.”

의병들의 동요를 잠재운 후 김준은 자신이 직접 앞장서서 돌담에 기대어 침착하게 총을 쏘아댔다. 의병들이 전의를 회복하고 반격하자 마침내 적들이 오히려 당황하여 마침내 퇴각하고 말았던 것이다.

문수사 전투 후 김준의 군사적 지식과 대담성을 높이 산 기삼연은 그를 선봉장으로 임명했다. 김준이 가세한 호남창의회맹소의 군진은 다음과 같다. 주1)

주1) <의소일기> 9월 24일자에는 호남창의회맹소의 군진이 정해지고 그 날 의병들이 함께 불렀다는 다음과 같은 노래가 전해진다.“우리 2천만 예의민족이 어이 왜적에 굴하며, 우리 3천리 금수강산을 어이 왜적에게 주랴. 아아! 우리 동포형제들이여, 불공대천의 원수들을 멸하고, 우리 성상 모시세 만만세.”
호남창의회맹소 대장 기삼연 / 통령 김용구 / 참모 김엽중, 김봉수(金鳳樹) / 종사 김익중, 서석구(徐錫球), 전수용, 이석용 / 선봉 김준 / 중군 이철형(李哲衡) / 후군 이남규(李南奎) / 운량(運糧) 김태수(金泰洙) / 총독(總督) 백효인(白孝仁) / 감기(監器) 이영화(李英華) / 좌익 김창복(金昌馥) / 우익 허경화(許景和) / 포대(砲隊) 김기순(金基淳)

조직을 정비한 기삼연은 막하 장수들과 향후 전략과 일정을 계획한 후 전국에 격서문(檄書文)을 띠웠다. 위의 호남창의회맹소의 간부 명단도 이 격서문에 실려 있었다.

“호남창의회맹소 대장 기삼연, 통령 김용구(이하 군진 명단 생략) 등은 삼가 격문으로 국내 여러 동포들에게 고하나이다. 대저 왜노란 섬 한가운데 조그만 오랑캐로서 천지간에 사특한 기운을 타고난 자들이다. 옛날 수길(토요토미 히데요시)이 제 임금을 죽이고는 감히 명나라에 범할 마음을 가지더니 지금 박문(이토 히로부미)이 제 임금을 죽이고는 다시 방자히 이웃나라를 삼킬 꾀를 내었으니 팔도강산에 초목이 모두 놀래고 이릉(二陵, 임진왜란에 성종의 능과 중종의 능을 왜놈들이 발굴했음)의 바람, 비에 귀신도 또한 울었도다. 3호만 남아도 초나라가 반드시 진을 망칠 것이라던 옛날의 예언도 있었는데, 9대의 원수인 기국(紀國)을 토벌하는 제나라에 세월은 더디었네.(중략)

이집트 민족이 멸망한 것은 서방에 밝은 전감(前鑑)이 있고, 유구(琉球, 오키나와)가 일본의 고을이 되고 만 것은 동양에 엎어진 전철이 있도다. (왜노는) 오라로 묶이고 형틀에 매어서 서묵(西墨)주2)의 귀신이 되고 말았으니 수레로 실어가고 배로 운반하여 장차 동해 같은 깊은 욕심을 채우리로다.

주2) 서묵은 서양과 아메리카의 뜻으로 풀이된다. 당시 묵국은 멕시코를 지칭하였는데, 문맥상 아메리카를 상징한 표현으로 보인다.

죽을 때를 만나 울부짖기보다는 시기를 타서 일제히 일어남만 같지 못하다. 아 저들은 (제도의) 변경과 개혁을 마음대로 하고 임금을 폐하고 세움도 저들의 손에 달렸도다. (중략) 우리 임금은 어디에 있는가. 28대의 현성(賢聖)이 서로 계승하였으며 본국이 비록 쇠하였다 하나 삼천여리의 산천은 그대로일세. 대신이란 자는 적의 앞잡이 노릇하지 않는 자 없고, 머리 깎고 얄궂은 말을 하는 놈은 모두 왜놈의 창자를 가진 자들이다. 비록 오랫동안 하늘의 징벌 피했을지 모르나, 어찌 잠깐인들 의병들의 베임을 비껴나랴.
우리들은 조상의 피를 받아 이 문명한 나라에 태어났으니 차라리 바다에 빠져 죽을지언정 남의 속국인 작은 조정에는 살지 못하겠으니, 우리에게는 오로지 태황제가 계실 뿐이다.(중략)

각기 반드시 죽을 각오로 분발하여 나중에 죽음을 후회하는 일이 없게 하라. 조선에 살고 조선에 죽어 아버지와 스승의 교훈을 저버리지 말 것이요, 적을 죽이거나 적에게 붙거나 반드시 국법에 따라 상벌을 시행할 것이다. 이 격문이 도착하면 풀이 바람을 따르듯 하라. 복심을 헤쳐 널리 고하노라.“

기삼연은 이 격문에 다음과 같은「고지문」을 붙여 왜놈의 머리 1개를 베면 돈 1백냥, 순검이나 일진회원이 왜놈 1명의 목을 베면 죄를 면해주고, 2명의 목을 베면 상으로 1백냥을 주겠다고 공고하였다.

여러 고을에 격문을 발한 기삼연은 대오를 정비하여 문수사에서 10여리 떨어진 덕산으로 진을 옮겼다. 이는 재차 있을 수 있는 적들의 예봉을 피해 고창읍을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기삼연은 사람을 고창(옛 이름, 모양) 읍내로 보내어 적정을 살피게 했다. 이 때 고창읍에는 의병과 내통하는 아전과 군민이 많았다. 정탐 결과 고창읍에는 분파소의 일병 외에는 다른 지원부대가 전혀 없으며 분파소의 병력도 얼마 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기삼연은 의병들을 이끌고 고창에 입성하였다. 10월 31일(음력 9월 25일)의 일이었다.주3)

주3) <전남폭도사>. 1907년 10월 28일~11월 1일자 기사에는 10월 28일 기삼연이 이끄는 의병 4백명이 왕녀봉(현 장성군 삼계면 수옥리 수각 앞산)에 둔집하였고, 10월 31일에는 다시 석수암에 모였다. 11월 1일에는 고창을 습격, 일인 2명을 참살하고 고부경찰서원과 교전한 1백명의 의병이 영광분파소를 치려고 함에 함평, 영광, 법성포가 합동 경계했다고 하였다. 또 일본군 보병 제14연대의 <진중일지> 11월 1일에는 광주수비 제2대대장 후와(不破)소좌로부터 ‘목포, 전주 간의 전선이 또 고창 부근에서 불통이 되었다’는 전보 보고가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일본측의 기록은 같은 기간 김용구가 쓴 <의소일기>의 기록과 거의 일치한다. 단, 일본측 기록에는 고창 전투의 전개 상황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술이 없다. 본문에서 적은 적의 사망 기록은 의병측 자료에 의거한 것이다.

의병들이 고창읍에 입성하자 일병들은 반격에 나섰으나 수적으로 의병군의 위세에 눌려 도망치고 말았다. 의병측의 기록에 전투에서 사망한 적병 수가 20명에 달한다고 했으니, 다소 과장된 숫자일지는 몰라도 적의 피해가 컸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기삼연은 통령인 김용구를 불러 일병의 병기고를 접수토록 하였다. 일병의 병기고에서는 수십 자루의 총과 탄약이 나왔다. 여기서 획득한 양총은 선봉장 김준에게 주었다.

기삼연의 의병진이 입성하자 고창읍민들은 술과 고기를 가져와 이들을 대접하였다. 의병들은 오랜만의 푸짐한 음식에 마음껏 마시고 또 취했다. 모든 병사가 곤히 잠들어 있는 사이 일병 첩자가 살며시 성을 빠져나가 적에게 성안 의병들의 동향을 밀고하였다. 새벽녘 일병 한 부대(고부경찰서원으로 추정)가 어둠을 뚫고 고창성 안으로 기어들어왔다. 성안에 들어선 일병은 의병진지에 근접하여 포대를 설치하고 무차별로 사격을 가하였다.

갑작스런 적병의 공격으로 의병들이 당황하여 이리저리 넘어지는 등 어찌할 바를 몰랐다. 가까스로 기삼연, 김용구, 김준, 김익중, 이남규, 유인수 등이 수십 명의 병사들을 수습하고 이들을 지휘하며 혈전을 벌였다. 날이 밝자 그간 당황하던 의병진은 점차 전열을 정비하고, 이에 주민들마저 가세하여 적을 공격하니, 의병군을 제압하려던 적병들이 도망하기 시작했다. 2~3시간여에 걸친 대혈전이었다. 이 때 의병측의 기록은 적병 중 죽은 자가 수십 명이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의병측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종사인 김익중이 전투를 지휘하다 적탄에 맞아 숨졌고 의병측 병사도 2명이 전사했다.

고창읍성을 점령할 때에도 김준은 선두에 서서 의병을 지휘하였다. 하지만 곧바로 일본군경의 역습을 받아 고창읍성을 내주고 말았다. 기우만이 쓴「박영건전(朴永健傳)」에는 이 때 성 밖으로 빠져 나와 퇴각하는 도중에 적의 유탄을 맞아 서너 명의 희생자 발생했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퇴각하는 와중에도 적의 집요한 추격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삼연은 전사한 의병군을 장사지내고 고창에서 철수, 장성으로 향하였다. 이 때 남은 군사는 겨우 18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즈음 함평의 진사로 후군장(後軍將)이었던 이남규가 고창 용두촌(龍頭村)에서 유숙하다가 적에 체포당하고 말았다.

참고문헌
- <성재선생 거의록>
- <의소일기>
- <전남폭도사>
- 홍영기 편저, <義重泰山 –한말의병장 죽봉 김태원·청봉 김율
자료집->, 죽봉 김태원 의병장 기념사업회,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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