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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삼연, 수연산 석수암에서 의병을 일으키다
홍순권 2014-07-14 14:49:00 3465

제11회 기삼연, 수연산 석수암에서 의병을 일으키다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기우만의 장성의병이 해산된 이후 기삼연은 장성에 은거하면서 새로운 기회를 엿보았다. 그는 1896년 장성 거의에 함께 참여했다가 흩어진 동지들과 뜻있는 인사들을 자주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여 시국에 관하여 의논하였다. 그러한 와중에 그의 집에는 화약을 구하는 사람, 실탄을 구하는 사람, 말, 창, 칼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졌다. 이를 눈치 챈 장성 관아에서는 기삼연에게 국법을 어기는 일은 하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하였다.

1902년 2월 8일은 기삼연의 막내딸이 시집가는 날로 하남 마을이 떠들썩하였다. 보룡산(步龍山) 중턱에 자리 잡은 기삼연의 집 큰 마당에는 널따란 차일이 쳐지고 많은 하객이 몰려들었다. 정오 쯤 신랑이 당도하여 대문 안으로 들어서고, 이제 막 혼례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대문 밖이 소란하더니 갑자기 진위대 군사가 기삼연의 집에 들이닥친 것이다. 군사를 지휘한 사람은 전주 진위대장 김한정(金漢鼎)으로 관찰사 조한국(趙漢國)의 명령을 받고 기삼연 선생을 모시러 왔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기삼연은 딸이 시집가는 경사 날 전주감영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가 전주 진위대에 의해 체포된 혐의는 1894년 갑오농민전쟁 당시 동학의 우두머리였던 김문행(金文幸)이란 자와 통모(通謀)하여 반정부운동을 꾀하였다는 것이다. 영학당과 동학당에 이어 활빈당의 출현으로 정국이 시끄러울 때였던 만큼 과거 동학이나 의병에 가담했던 자에 대한 관의 감시가 끊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이 사건은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는 단계에서 기밀이 누설되었다. 이 사건의 내막에 대해서는 1903년 2월 평리원 재판장 이남희(李南熙)가 법부대신 이재극(李載克)에 보낸 ‘피고 김문행의 안건’에 대한 질품서(質稟書)에 그 내용이 비교적 자세하다. 그 요지는 아래와 같다.

첫째, 피고 김문행을 심문였더니 그는 1896년 호남 유림의 소수(疎首 상소인의 우두머리)인 기우만과 영남 유회(儒會)의 소수인 노인구(盧仁球)가 개최한 장성 모임에 참가한 자이다.

둘째, 김문행의 자백에 의하면 그는 이후 어떠한 정치적 활동도 하지 않았으며, 단지 체포되기 전 기삼연으로부터 복수거의(復讐擧義), 즉 왜적을 복수하기 위해서 의병을 일으키자 라는 내용의 서신을 받았으나, ‘지금은 망동해서는 안된다.’는 취지로 답장을 보냈다.

셋째, 평리원에서 전주 진위대에 알아본즉, 피고 김문행은 1894년 금구 및 태인 지방에서 벽보를 붙여 백성을 선동한 인물이었다.

넷째, 전라북도 태인군의 보고에 의하면 김문행은 동학교도로 갑오농민전쟁 당시 김개남 휘하의 대접주(大接主)였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평리원 재판장은 김문행에 대해서 태(笞) 1백에 종신징역을 법부대신에게 청구하였다.

김문행과 함께 연루된 사건으로 체포된 기삼연은 전주로 끌려가 전주옥에서 10여 일 동안 머물다가 서울 평리원으로 옮겨갔다. 평리원은 한말의 재판소로 1895년 의금부를 고등재판소라 고쳐 부르다가 1899년 평리원으로 개칭하였다. 장성의 기삼연이 평리원에 이송되었다는 보고는 평리원장 이용태에게 곧 바로 전해졌다.

이용태는 갑오농민전쟁의 발단이 된 고부 농민봉기(고부민란) 때 장흥부사로 있으면서 안핵사로 파견되어 사건을 수습하던 과정에서 동학교도를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봉기 가담자를 무차별적으로 처벌 학살하여, 이른바 3월 무장 봉기(제1차 농민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인물이었다. 그는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태리 프랑스 등 5개국 공사관의 참사를 지냈던 인물로 기삼연과는 평소 잘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

기삼연이 평리원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관에서 죄수들의 머리를 깎으려 하였다. 그러나 옥리가 기삼연의 머리를 깎으려 하자, 그가 ‘머리카락 대신 목을 베라’고 꾸짖으며 저항하는 바람에 옥리는 그의 머리를 깎지 못했다. 이 일이 평리원장인 이용태에게 알려진 직후 얼마 안 되어 기삼연은 풀려났다.

기삼연이 출옥할 수 있었던 데는 평리원장 이용태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실제 내막은 명망 유생으로서 기삼연의 신분과 장성 지역사회에서 기씨 가문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 등을 감안하여 방면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김문행에 대해서는 이미 8~9년이나 지난 갑오농민전쟁 전후의 일을 가지고 죄목을 붙여 중벌을 내렸다.

오준선이 쓴 <의병장 기삼연전>에는 기삼연이 1896년 의병 해산 이후 동지들과 비밀리 거사를 도모하다가 적에게 누설되어 전주로 잡혀 간 일이 있다고 했는데, 이는 바로 위 사건을 두고 한 말이다. 기삼연이 유생이면서도 동학에 대해서도 우호적으로 접촉했기에 관의 감시망에 포착된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기삼연은 평리원 감옥에서 풀려 난 뒤 곧장 장성의 고향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수개월 동안 떠돌이 방랑생활을 하였다.

기삼연이 평리원 옥에 갇혔다가 풀려나올 즈음 한반도의 정세는 날로 급변하였다. 몽금포 사건 이후 러시아와 일본 간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1904년 2월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러일전쟁이 터지고, 한반도는 일본군의 군화와 말발굽에 의해 주권이 유린되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 여세를 몰아 고종황제의 재가도 받지 않은 채 이른바 을사오적을 앞세워 1905년 11월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이를 흔히 ‘을사늑약’이라고 한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일제의 보호국이 되어버린 대한제국은 이제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나 다름없게 되었다.

을사늑약의 소식이 전해지자 일제의 국권 침탈에 분노하며 을사오적을 규탄하는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애국적 유생들과 전직 관리들의 상소가 조정에 빗발쳤다. 그 중에는 78세의 노구를 이끌고 상경하여 상소를 주도하였던 전 좌의정 조병세와 시종무관장 민영환 등이 있었다. 두 사람은 결국 우국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고 말았다. 이들 외에도 전 참판 홍만식, 전 참판 송병준(宋秉濬) 등 수많은 인사들이 잇달아 분노 끝에 자결을 택하였다.

상소운동과 자결 등으로 반일감정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러일전쟁을 계기로 재기한 의병들의 항쟁은 을사늑약으로 인하여 더욱 확산되었다. 1906년 3월에는 경북 영덕에서 평민의병장 신돌석이 의병을 일으켰고, 그 해 5월에는 전 참판 민종식이 충남 홍산(鴻山)에서 행동을 개시하여 홍주성에 입성하였다. 민종식의 뒤를 이어 최익현이 전북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강회를 열고 거의하였다. 민종식 의병부대는 홍주성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하여 흩어졌고, 최익현 의병부대 역시 순창에서 전주 및 남원진위대에 포위되어 진용을 해산하고 말았다.

민종식과 최익현 같은 명망가들의 의병 봉기가 실패로 끝난 다음에도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일어나 항쟁을 멈추지 않았다. 앞서 언급했듯이 호남에서는 그 해 11월 전 주사 백낙구가 고광순, 이광선 등과 공모하여 구례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곧 체포되었다. 이어서 12월에는 남원에서 양한규가 봉기하여 진위대를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 이듬해 1907년 1월에는 창평에서 고광순이 ‘창평의진’을 결성하였다.

방랑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기삼연은 그동안의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을사늑약 있기 얼마 전 은밀히 일을 도모할 목적으로 일본인과 관가의 눈을 피해서 거처를 송계(松溪)로 옮겼다. 송계는 수연산(隨緣山) 기슭의 산골로 낮에도 산짐승이 나타날 정도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현재 장성군 서삼면 축암리이다.

수연산 송계로 거처를 옮긴 기삼연은 낮에는 저자에 나아가 술꾼 행각을 벌려 관아와 경찰의 눈을 속이면서 ‘일심계(一心契)’를 조직하여 김용구 등과 은밀히 거사를 논의하였다. 이와 동시에 뜻을 같이 할 사람들을 모았다. 거사를 위해서는 사람도 필요했지만 무엇보다 적을 무찌를 수 있는 병기와 군량미가 충분히 확보되어야만 했다.

특히 총을 수집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던 중 종손(從孫)인 형도(衡度)의 사냥총까지 빌렸다. 형도가 기삼연에게 내준 총 가운데는 관아에 신고된 것도 있었다. 이 일이 있은 뒤 얼마 안 되어 관에서는 신고한 총의 관가 유치 명령을 내렸으나, 형도는 총을 분실하였다고 거짓 보고하였다. 이 일로 그는 일본군에게 끌려가 총의 소재를 묻는 일본병사으로부터 독한 고문을 당하였다고 한다.

기삼연은 총기를 수집하는 일 이외에도 믿을 만한 제약사로 하여금 화약을 직접 제조케 하고, 대장간을 꾸려 실탄을 제조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또 중형인 양연과 전 군수 이용중(李容中) 등으로부터 막대한 군자금을 얻어냈다. 당시 이용중은 기삼연의 거사 계획을 알고 선뜻 9백 냥의 거금을 내놓았다고 한다. 당시 쌀 한섬에 8냥이었다고 하니 적지 않은 액수임을 짐작할 수 있다.주1)

주1) 이 부분의 내용은 김동수, <의병열전>, 《광주일보》 1976년 12월 30일자의 내용을 참조한 것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이용중은 고종 26년(1889) 12월 해남 현감에 오른 것으로 되어 있다.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

거사 준비가 상당한 정도 진척되자 기삼연은 우선 장차 스스로 의병을 일으킬 것임을 고하는 상소를 고종황제에게 올렸다.주2) 글의 내용은 오늘날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올바른 인재 등용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자신이 의병을 일으키려는 것은 사대부로서 나라의 위급한 상황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부득이하게 취하는 조치임을 역설하였다. 동시에 그는 오늘날의 위기에 대한 임금의 책임 또한 통렬히 지적하였다.

주2) 첩황(貼黃)이 첨부된 이 상소는 작성 일자가 명백하지 않다. 다만, 상소 내용 중에 “폐하께서 위에 오르신지 40년에.....”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1907년 7월 고종의 강제 퇴위가 있기 직전에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사태는 더욱 급박해지고 있습니다. 강토를 돌아보면 이것이 누구의 땅입니까? 아! 슬프도다. 이 강산은 단군· 기자의 옛 터전입니다. 국가는 조종(祖宗)의 홍업(鴻業)입니다. 폐하께서 앞 성인의 옛 물건을 가지셨고, 선조의 대업을 이어서 지키셨는데 하루아침에 버리는 것은 참으로 무슨 마음이옵니까? 혹시 폐하께서는 오늘 국가의 형편이 사람의 잘못이 아니고 운수의 소관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시어 구차스럽게 하루라도 임금의 자리를 누리실 뿐이옵니까?”

이처럼 기삼연이 본격적인 의병항쟁을 위해서 거병 준비를 진행하고 있을 즈음 일제는 1907년 7월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곧 이어서 일제는 8월 1일을 기하여 대한제국 군대마저 강제로 해산하였다. 군대해산 과정에서 상당수의 군인들이 총부리를 일본에 돌리고 저항하였다. 이들 해산군인들은 각지의 의병부대와 협력하면서 활동하다가 점차적으로 반일의병부대의 항쟁 대열에 합류하였다. 물론 기삼연의 거의는 군대해산 이전부터 오랫동안 계획된 것이었다.

1907년 9월 29일(음력 8월 9일) 기삼연은 마침내 수연산 중턱 석수암에서 수백 명의 동지들과 함께 ‘의를 들어 적을 토벌할 것(擧義討賊)’을 맹세하고 의병봉기의 횃불을 올렸다. 의병부대의 명칭은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라고 정하였다. 수연산은 영광, 장성, 고창을 경계로 한 산이다. 기삼연이 수연산을 거병의 본거지로 삼은 것은 이곳이 병력을 운용하기에 용이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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