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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우외환에 휩싸인 고종의 꿈과 좌절
홍순권 2014-07-14 14:48:00 3803

제10회 내우회환에 휩싸인 고종의 꿈과 좌절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1896년 2월 아관파천 뒤 고종이 파견한 선유사의 회유로 각지의 의병부대들이 해산한 이후에도 고종의 환궁과 자주독립을 바라는 여론은 끓이지 않았다. 이러한 여론을 등에 업고 고종은 1897년 2월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로부터 6개월 뒤 연호를 광무로 정하고, 10월에는 원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자주독립을 선언한 고종의 신정부는 곧 이어 ‘옛것을 근본으로 하고 새로운 것을 참작한다.’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원칙을 내세워 이른바 ‘광무개혁’으로 불리는 새로운 개혁정책을 시행해 나갔다. 이는 외세의존적이었던 갑오정권의 개혁정책에 대한 반성에 토대를 두고 농민전쟁이나 의병운동에서 나타난 농민층과 척사파 유생들의 요구를 감안한 것이었다.

일본에 기대어 급격하게 추진한 갑오정권의 개혁 방식과는 달리 과거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서양의 법과 제도를 수용하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에 입각한 점진적인 개혁 방식을 택하였다. 여기에는 김병시, 조병세 등 보수유생층과 갑오개혁에 참여했던 박정양, 김가진, 그리고 독립협회의 지도부 등도 참가했다.

1899년 8월 17일 고종은 대한제국의 헌법이라 할 ‘대한국국제’를 공포하였다. 대한국국제는 육해군의 통수권, 입법권, 행정권, 관리 임명권, 조약 체결권과 사신 임명권 등 모든 권환을 황제인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군주권의 범위와 대상을 규정함으로써 안으로는 군주가 최고 권력자임을, 밖으로는 대한제국 주권이 외국의 간섭을 받지 않는 독립국가임을 선포하였다.

고종은 이러한 바탕 위에서 이른바 ‘광무개혁’을 통해서 자주독립의 꿈을 실현하려 하였다. 군제를 개편하여 군비를 늘리고, 재정을 늘리기 위해서 궁내부와 내장원의 기능과 권한을 강화하였다. 또 근대적인 토지소유권을 확립하고 재정 기반을 늘릴 목적으로 양지아문과 지계아문을 설치하여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였다. 아울러 지방제도를 23부제에서 13도제로 바꾸어 지방행정 경비를 줄이고자 하였다.

광무개혁은 근대적인 상공업을 진흥, 육성하는 방향에서도 이루어졌다. 정부는 식산흥업 정책을 내세워 근대기술의 도입을 서두르고 근대적인 회사와 공장을 세웠다. 또 인력 양성에도 힘써 기술학교를 세우고 해외에 유학생을 보냈다. 서북철도국․철도원 등을 두어 철도를 부설하려 했고, 금본위제에 바탕을 둔 화폐제도 개혁과 중앙은행의 창립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한성을 근대도시로 탈바꿈하려고 도로를 고치고 전차를 가설하였다.

고종은 갑오개혁 때와 달리 내각보다는 황제권의 강화를 통해서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다. 그러나 고종의 이러한 정책 구상은 구미파라고 불리는 서재필 등의 개화세력으로 구성된 독립협회로부터 강한 견제와 비판을 받았다. 독립협회는 출범 초기 정부 정책에 적극 협조하여 정부 구성원으로 참여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대한제국에 대한 내정 간섭과 이권 침탈을 본격화하는 과정에서 정국 운영을 둘러싸고 친미 경향의 일부 독립협회 세력은 정부와 충돌하기 시작했다.

서재필을 따르는 독립협회의 인사들이 고종의 황제권 강화과 친러정책에 강하게 비판하자, 정부는 서재필을 고문직에서 해임하고 미국으로 출국하도록 조치하였다. 이에 맞서 독립협회 인사들은 1898년 3월 만민공동회를 열어 정부의 방침을 정면에서 반박하고 상소운동을 벌였다. 이처럼 만민공동회의 개최로 이로 인하여 정부와 독립협회 인사들 간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정부는 1898년 12월 황국협회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의 활동을 금지하고 독립협회를 해산시켰다.

고종은 강력한 전제군주제를 확립하여 부국강병의 근대주권국가를 만들려 하였다. 그리하여 짧은 시간에 국방, 산업, 교육, 기술 면에서 일부 성과를 내기도 하였으나 세력 균형을 앞세운 대외의존적 정책 탓에 열강의 정치적, 경제적 침략을 막지 못했다. 게다가 개혁에 필요한 재원 마련을 위해 민중을 가혹하게 수탈하여 민중의 저항에 부딪혔다.

1894년 농민전쟁의 패배 이후 주춤했던 민중들의 저항은 1898년이 되면서 다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지주에게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는 항조운동과 정부 또는 지방관의 부당한 조세 수취에 저항하는 항세운동 등과 같은 농민봉기가 잇달았다. 이러한 자연발생적인 농민들의 저항이 이어지는 가운데 영학당(英學黨), 동학당, 활빈당 같은 무장집단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국의 종교인 것처럼 위장한 영학당은 1894년 농민전쟁에서 살아남은 세력으로서 농민전쟁의 중심 지역인 고부와 흥덕 등지에서 일어났다.

영학당은 1899년 5월 ‘보국안민’을 내걸고 반봉건·반침략항쟁에 나섰다. 영학당은 고부, 흥덕, 무장 등지를 공격하여 무기를 확보하고 광주, 전주를 차례로 점령한 뒤 서울까지 진격하려 했으나 고창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패하고 말았다. 1900년 무렵에는 해주, 재령 등 황해도와 소백산맥 지역에서도 동학당이 중심이 되어 무장 항쟁을 벌렸다.

활빈당이란 《홍길동전》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가난한 사람을 살려내는 무리’라는 뜻을 지녔다. 이들은 지역별로 독립된 여러 개의 조직이 각자 십여 명에서 수백 명씩 무리를 지어 비밀리 활동하였다. 각 조직은 1900년 전후로 충청․경기도, 낙동강 동쪽의 경상도, 소백산맥 부근의 전라도를 중심으로 독자 활동을 하면서 때로는 서로 연계하여 활동하였다.

엄격한 내부 규율을 지닌 이들은 1900년 4월 나라 안팎의 위기에 대처하여 ‘대한사민논설 13조목’이라는 강령을 공표하기도 하였다. 이 강령에는 자본주의 열강의 이권 침탈 반대, 방곡령 실시, 균전제 실시, 잡세 폐지와 구민법 실행 등의 요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활빈당은 스스로 의적이라 부르면서 양반 부호나 지방 관아에서 재물을 빼앗아 이 가운데 일부를 빈민에게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또 때로는 ‘수적(水賊)’이 되어 일본인 장사배를 약탈하여 빼앗은 재물을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들은 1905년 을사늑약 무렵 때까지 활동을 계속하다가 이후에는 의병항쟁에 합류하였다.

농민봉기는 제주도에서 일어났다. 1898년 탐관오리의 수탈에 못견딘 농민들이 방성칠을 우두머리로 내세워 항거하였다. 이어서 1901년에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강압적인 선교 활동, 왕실의 사적 수탈, 일본 어선의 침탈 등에 저항하여 이재수가 이끈 농민들이 봉기했다. 이른바 ‘이재수의 난’이었다. 특히 선교사의 무리한 포교활동으로 인하여 제주 민중들은 서양 종교 전파 그 자체를 제국주의 침략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러한 국내적 위기와 더불어 청일전쟁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도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때 민씨세력을 몰아내고 친일개화파 정권을 수립하여 한반도의 이권을 독식하는 듯했다. 그러나 ‘삼국간섭’ 이후에는 일본을 대신하여 러시아가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급속히 늘려나가게 되었다. ‘삼국간섭’ 이란 일본이 승전 대가로 청으로부터 넘겨받은 요동반도를 러시아를 비롯하여 프랑스와 독일의 압력에 굴복하여 청에게 되돌려 준 사건이다.주1)

주1)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전 대가로 청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확인받았을 뿐만 아니라, 대만과 요동반도를 할양받았다. 이러한 일본의 동북아에서의 영향력 확대에 불안을 느낀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압박으로 일본은 요동반도를 되돌려 줄 수밖에 없었다.

동북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증대하면서 일어난 사건의 하나가 바로 아관파천이었다. 그러나 고종의 환궁 이후에도 한반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은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한순간에 러시아에게 자리를 빼앗긴 일본은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서 ‘조선독립’을 명분으로 러시아와의 교섭을 통하여 조선에서 세력균형을 확보하는 데 힘을 쏟았다. 러시아 또한 일본과의 군사충돌을 피하려 신사협정을 체결하였다. 1896년 5월 6월에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는 ‘웨베르 - 고무라 각서’와 ‘로바노프 - 야마가타 협정’이 잇달아 체결되었다.

한반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확대되자 이를 가장 경계하고 나선 나라는 영국이었다. 이미 1887년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한다는 구실로 거문도를 점령한 적 있는 영국은 10년 만에 또 다시 거문도를 점령하였다. 대한제국의 재정고문이던 영국인 브라운을 해고하고 러시아인 알렉세예프를 들어앉히자 브라운의 원상 복귀를 요구하며 무력시위를 한 것이다.

미국 또한 러시아가 만주에서 영향력을 확대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 조선에서 빼앗은 이권을 일본에 넘겨주었다. 일본도 대한해협을 봉쇄하여 러시아에 맞섰다. 이러한 팽팽한 긴장관계는 1898년 4월 러시아와 일본이 ‘로젠 - 니시 협정’을 맺어 두 나라가 이미 조선에서 빼앗은 이권을 서로 승인함으로써 일단 해소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일본은 러시아와 장차 전쟁을 치를 것에 대비하여 군사력을 증강하는 한편,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반대하는 미국과 영국에 접근해 외교관계를 강화하였다. 이 시기 일본은 영국과 미국 제국주의의 지원에 힘입어 한반도에서 지배권을 되찾으면서 전쟁 준비에 힘을 쏟았다.

러시아는 1896년 함경북도 경성, 경원의 광산 이권 및 압록강 유역, 두만강 유역, 울릉도 등의 삼림채벌권을 획득하고, 러시아 관리를 재정, 군사 고문으로 채용하게 하였다. 1900년 의화단사건으로 만주에 열강과 공동 출병한 러시아는 의화단이 진압된 뒤에도 계속 병력을 주둔시켜 자국의 세력화를 도모하였다.

이에 맞서 일본은 1902년 1월 영국과 제1차 영일동맹을 체결하였다. 그러자 러시아는 그 해 4월 청과 만주철병협정을 체결, 10월에 제1차로 군대를 철병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1903년 4월 제2차 철병 대신 군대를 한국 국경으로 남하시켜 벌채사업과 그 종업원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5월 용암포를 강제 점령하였다.

용암포를 조차하려던 러시아의 계획은 국내 여론의 반발과 일본․영국․프랑스․독일 등의 항의와 간섭으로 성사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와 전쟁을 일으킬 구실을 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반도는 청일전쟁에 이어 또 다시 열강 간의 각축과 전쟁으로 인해 국토와 국권을 유린당하게 될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동시에 광무개혁을 통해 근대적 주권국가를 이룩하려던 고종의 꿈도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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