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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의 가르침을 받은 백마장군, 기삼연
홍순권 2014-07-01 14:43:00 3162

제9회 노사의 가르침을 받은 백마장군, 기삼연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을미사변 이후 호남에서 의병운동에 앞장 선 인물이 기우만이었다면, 을사늑약 이후 호남지역 의병항쟁의 기폭제를 마련한 인물은 바로 기삼연(奇參衍)이었다.

장하도다 기삼연
제비같다 전해산
싸움 잘한다 김죽봉
잘도 죽인다 안담살이
되나 못되나 박포대

이 노래는 1907년 8월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당한 이후 호남지역에 불리어졌던 의병가로 당시 호남지역 의병항쟁의 실상을 반영하고 있다.주1)

주1) 이 노래는 1976년 12월 8일자 광주일보에 김동수가 쓴 의병열전에 실려 있다. 여기서 본명이 전수용인 해산(海山)은 기삼연이 일으킨 호남창의회맹소의 참모였고, 본명이 김준(金準)이고 자가 태원(泰元)인 죽봉(竹峰)은 호남창의회맹소의 선봉이었고, 안담살이 보성의 머슴 의병장 안규홍, 박포대의 본명은 박경래(朴慶來), 자는 도경(朴道京)로 그가 총을 잘 쏘았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이 노래에서 언급된 전해산은 일제 측 기록에 “죽고 삶을 미리 아는 심남일, 신출귀몰 전해산”이라 할 만큼 한말 호남지역 후기의병 투쟁에서 큰 명성을 떨쳤던 인물이다. 전해산은 그의 진중일기에서 다음 같이 적어 놓았다.

“비록 불민한 전수용(全垂鏞 : 전해산의 본명)으로도 일찍이 당세의 대인 군자를 상종하여 목숨을 바쳐서라도 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을 들었다. 호해(湖海)에서 칼을 집고 서서 모름지기 성옹(省翁 : 성재 기삼연)의 훈시를 받았었고, 일찍이 성시(城市)를 방황하면서 녹노(鹿老 : 녹천 고광순)의 절의(節義)를 들었다.”

이처럼 기삼연은 한말 호남지역 의병항쟁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907년 가을 기삼연이 창설한 호남창의회맹소는 이후 전개된 호남지역 의병투쟁의 모태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호남창의회맹소의 의병세력은 1908년 2월 기삼연이 순국한 이후에도 그의 순국 정신을 이어받아 각지로 흩어져 유격항쟁을 벌이면서 호남지역을 ‘의병전쟁’의 격전지로 만들었다. 그들은 1909년 가을 일본군대가 ‘남한대토벌’이란 이름의 대규모 군사작전을 실시할 때까지 끈질기게 대일항전을 벌임으로써 근대민족운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호남 의병장 기삼연은 철종2년인 1851년 1월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하남 마을에서 태어났다. 자는 경로(景魯), 호는 성재(省齋)이다. 1896년 기우만이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켰을 때 백마를 타고 군대를 지휘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그에게 백마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여주기도 하였다. 할아버지는 재선(在善), 아버지는 봉진(鳳鎭)으로 사마진사이고, 어머니는 고택(高澤) 고씨(高氏) 부사(府使) 신겸(信謙)의 딸이었다.

기삼연의 집안은 지주가로서 재력이 있었다. 영광의 김준식(金俊植)은 ‘성재실기서(省齋實紀序)’을 찬술하면서 기삼연의 집안은 누대로 벼슬이 이어져 온 집안으로 곡식과 포목과 바다 육지의 물산이 풍족하여 가마와 하인을 부릴 만하다고 하였다. 그가 뒤에 의병을 일으킬 때 이러한 재력은 큰 뒷받침이 되었다.

아버지 봉진은 노사 기정진과 육촌 형제간으로 노사는 기삼연의 재종숙(再從叔)이다. 또 앞서 살펴 본 기정진의 직손인 기우만은 기삼연의 삼종질(삼종질), 즉 9촌 조카가 된다. 기삼연이 손위이지만, 나이는 기우만보다 5살 아래였다.

기삼연은 성장기에 노사 기정진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유학의 경전에 능통하였으나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성리학에만 매달리지 않고 도교와 불교의 경전, 야사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공부하였다. 특히 병서를 열심히 읽고 연구하였으며, 필법에 뛰어나 독특한 서체를 남겼다. 그가 전형적인 유학자의 길을 걸으면서도 병서를 익힌 것은 아마 그의 성장 과정에서 외세의 침탈로 나라가 위기에 빠진 현실을 목격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삼연은 위로 진연(晋衍), 양연(亮衍)주2), 관연(觀衍) 세 형을 두었는데, 세 형 모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그는 과거에 별다른 뜻을 두지 않았다. 장성한 후에도 그는 기질이 호방하여 평소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하였고, 나이가 들어서도 사냥으로 소일하는 날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틈나는 대로 황룡면 하남 마을 보용산 중턱의 사랑채에 선비들을 불러 모아 놓고 시국에 대해 의논하면서 때로는 울분을 토하기 하였다.

주2) 양연은 아버지 봉진의 6촌인 만진(萬鎭)의 양자로 들어갔다.

기삼연은 젊었을 때 아버지와 형들의 권유에 따라 과거에 응시했다. 그러나 그는 과거에 크게 마음을 둔 것은 아니었다. 과거장에 나간 기삼연은 가장 먼저 글을 지어 시험관에게 주었으나 낙방하였다. 그는 낙방 소식을 듣고 내가 과거에 응한 것은 집안의 요구에 응한 것이지 벼슬을 하려했던 것이 아니라고 주위 사람에 말했다.

그 대신 그는 20대 한창 나이에 전국을 유랑하며 많은 사람과 교유하였다. 그가 교유한 인물 가운데 한양에서 만난 이준용(李埈容)이 있었다. 이준용은 대원군의 큰 손자였다. 둘 사이의 교분이 두터워지면서 이준용은 기삼연에게 대원군을 만나 뵐 것을 요구하였으나, 기삼연은 끝내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 당시 대원군과 왕비간의 갈등으로 나라 안이 편한 날이 드물던 때라 꺼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삼연의 나이 32세 때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이어서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이처럼 외세의 침탈로 국가 주권이 위협 받고 또 외세를 등에 업은 세력들이 서로 다투는 가운데 국론이 분열되고, 조정 안에서는 정쟁이 계속되었다. 마침내 민씨세력과 개화파세력 간의 권력투쟁으로 나라가 위기에 빠지자, 그는 어느 날 초산군수로 있던 형 양연(亮衍)을 찾아가 ‘요즈음 임금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 판국에 백성을 다스리는 군수 노릇은 해서 무엇 하느냐’며,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권고했다는 일화가 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기삼연은 기우만과는 달리 동학농민군의 행동이 진정으로 백성을 위한 길이라면 나무라고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일찍부터 기삼연은 반상(양반과 상민)의 담을 헐어버리고, 상민이나 포수, 심지어 건달패와도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갑오농민전쟁 발발 이후 동학운동이 남도 일대가 떠들썩할 즈음 그는 한때 곡성군수를 지낸 친구 이문영(李文榮)을 찾아갔다. 두 사람은 함께 축령산(鷲靈山)에 들어가 그 곳에 있는 형님의 별장인 육일정(六一亭)에서 책서(策書)와 주역을 읽으며 어수선한 마음을 달랬다. 이즈음 그는 선진문물을 직접 배우고 국제정세도 살피기 위해 중국 북경에 갈 계획을 세웠는데, 청일전쟁에서 청이 일본에 패하는 것을 보고 단념하였다.

일찍이 노사 기정진으로부터 척사사상의 영향을 받았던 기삼연은 청일전쟁으로 일본의 군마가 국토를 유린할 즈음부터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던 같다. 기삼연이 의병에 큰 관심을 갖게 된 데에는 그의 선비 기질이 남다른 데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하여 그의 전기를 지은 오준선(吳駿善)은 기삼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어려서부터 준걸하여 보통 아이와 달랐다..... 홀로 그 뜻과 기상이 높고 커서, 사해의 호걸들과 함께 크게 입을 열고 가슴속의 기이한 것을 토로하며, 큰 사업과 경륜을 쌓으려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이런 것을 더불어 말할 사람이 없음을 탄식하며, 항상 답답해 하였다.”

호남의사열전을 쓴 기우만의 기록도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굽히지 않는 굳건한 기개로 인해 항상 답답해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말하길, ...... 장부가 이 작은 나라에 태어나 뜻을 펴지 못하니, 마치 구름 사이를 날 날개가 새장 안에 갇혀 있음과 같다. 만약 방구석에서 편히 죽어 초목과 함께 썩어진다면, 태어나지 않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청일전쟁 이후 일제가 개화파 정권을 앞세워 내정간섭을 자행하는 한편 조선침략의 걸림돌이었던 왕비를 살해한데 이어 단발령이 공포되자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당시 기우만이 장성에서 의병봉기의 첫 봉화를 올렸을 때 기삼연은 마침내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약 3백 명의 의병을 이끌고 동참하였다. 그런데 군사 3백 명을 이처럼 짧은 시간에 모은다는 것은 사전 준비 없이는 일거에 해내기 어려운 일이다. 그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신분을 초월하여 젊은 장정들과 어울리고, 많은 선비들과의 만나 시국을 의논한 것도 일찍부터 의병에 뜻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기우만의 창의에 큰 기대를 걸었던 기삼연은 기우만이 선유사의 설득으로 의병진을 해산하자, 크게 분노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것이 어찌 임금의 명령인가? 역신(逆臣)의 강제일 뿐이다. 사람들의 말에 서생과는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없다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그러나 이후에도 기삼연은 그 자신이 가야할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 참고문헌
- 김동수, 의병열전 성재 기삼연, 전남일보, 1976년 12월 8일 ~ 1977년 1월 14일
- 윤사순, 20세기 초 의병정신에 담긴 민족의식 – 성재 기삼연의 경우 -, 동아시아 국제관계사(김준엽 선생 기념서 편찬위원회 편), 아연출판부, 2010
- 성재기선생거의록약초(省齋奇先生擧義錄略抄) 외, 독립운동사자료집 제2집 의병항쟁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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