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DATA[처음-행주 기씨 한말 의병]]> http://tour.jangseong.go.kr ko 처음 Wed, 18 Jul 2018 23:36:53 +0900 홍순권 <![CDATA[한국근대 민족운동과 장성의병을 돌이켜 보며]]> 제20회 한국근대 민족운동과 장성의병을 돌이켜 보며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1896년 2월 기우만의 장성 거의로부터 시작된 행주기씨의 의병운동은 이후 1907년 기삼연의 재기로 이어져 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의 큰 불씨를 지폈다. 이는 또 다른 한편으로 기삼도의 매국오적 암살 시도와 1919년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통한 항일투쟁으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행주기씨의 이러한 민족운동의 정신적 뿌리가 노사 기정진의 척사사상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감안한다면, 장성 지방에서 행주 기씨 집안이 일으킨 민족운동은 무려 4대에 걸쳐 지속된 것으로 우리나라 근대 민족운동사상 보기 드문 사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9세기 중엽 노사 기정진이 기초를 닦아놓은 척사사상을 단순히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오로지 성리학을 높이 세우고 다른 모든 사상은 이단으로 배척하는 그야말로 세계정세의 흐름과는 맞지 않는 시대에 뒤떨어진 고루한 사상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서세동점의 물결을 타고 서양세력과 일본에 ...]]>
Wed, 31 Dec 2014 14:54:00 +0900
홍순권 <![CDATA[독립운동 자금 모금으로 옥살이 한 기산도, 장흥 객창에서 외로이 숨지다]]> 제19회 독립운동 자금 모금으로 옥살이 한 기산도, 장흥 객창에서 외로이 숨지다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옥에서 풀려난 기산도는 곧바로 광주로 내려갔다. 종조부인 의병장 기삼연이 순국한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기산도는 어려서부터 기삼연의 총애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역시 기삼연을 존경하고 따랐다. 일설에 따르면, 기산도가 매국오적을 암살하기에 앞서 종조부 기삼연의 지도가 있었다고 한다.

기산도가 옥에서 풀려난 것은 <<폭도편책>>에 실린 광주경찰서장 반도에이지로(坂東榮次郞)의 보고로 미루어 볼 때, 2월 중순 경으로 짐작된다. 기산도가 이근택에 대한 살인미수로 체포되어 옥에 갇힌 것이 1906년 2월이고 2년 반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니 만기보다 6개월 먼저 출소한 셈이 된다. 반도에이지로의 보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월(2월) 17일자로 장성주재 순사로부터 다음과 같은 보고가 있었다. 즉, 당군(장성군) 서삼면 송계리에 거주하는 기모는 그의 아들 기산도와 같이 기삼연의 사체를 장사지내고, 또 기삼연의 ...]]>
Tue, 30 Dec 2014 14:54:00 +0900
홍순권 <![CDATA[기산도, 이근택 암살 계획을 결행하다.]]> 제18회 기산도, 이근택 암살 계획을 결행하다.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상동교회 모임 후 상소투쟁에 나섰던 최재학 등이 구속되자, 기산도는 동지 손성원, 박용현, 김필현, 이태화 등에게 오적의 출입을 감시하게 하는 한편, 을사오적 처단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기산도는 을사오적을 처단하고자 박종섭, 박경하, 안한주, 이종대 등과 결사대를 조직하고, 권총과 단도를 각자 지니고 종로에서 이근택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자살(刺殺, 칼로 찔러 죽임)하려 했으나, 경호가 심하여 실패하였다.

이후 광군(礦軍)을 모집하여 오적 행차시 돌을 던져 경호인들을 분산시킨 후에 자살을 시도할 생각으로 박경하와 용산에 가서 광군을 모집하려 했으나 또한 실패하였다. 광군 모집에 실패한 기산도는 이날 9시경 결사대 본부인 니동(泥洞) 한성모 집에서 다른 동지들과 함께 경무고문 마루야마(丸山重俊)의 부하에게 체포되었다. 박종섭, 박경하, 안한주, 이종대. 손성원 등도 함께 체포되었으며, 이들은 일본헌병대에서 갖은 고문과 매질을 당한 뒤 얼마 후 석방되었다.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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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 30 Dec 2014 14:53:00 +0900
홍순권 <![CDATA[유학자 집안에서 자라 기독교 청년이 된 기산도]]> 제17회 유학자 집안에서 자라 기독교 청년이 된 기산도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기산도는 일명 경(慶)으로 1878년 10월 16일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에서 유학자인 식재(植齋) 기재(奇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 진도가 빨라 종조부인 양연과 삼연으로부터 다른 아이들보다 더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기산도의 아버지 기재도 노사의 학풍을 잇는 행주 기씨 가문의 젊은 선비였지만, 그의 종조부인 양연, 학연, 관연, 삼연과 11촌숙인 기우만은 당대에 호남에서 잘 알려진 유학자들이었다. 이러한 가학적(家學的) 분위기에서 자란 기산도 또한 어려서부터 유학자로서의 학문적 소양을 착실히 키워나갔다.

기산도는 16세 때인 1893년 녹천 고광순의 고명딸과 결혼하였다. 고광순은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아버지인 의병장 고경명과 함께 순국한 고인후의 종손이다. 고광순의 장흥 고씨 가문도 창평은 물론 호남 일대에서 으뜸가는 명문가군에 속하였다. 고광순은 학식과 덕망으로 이름 있는 선비였으며, 젊어서 기정진의 문하로 들어가 기우만, 기삼연 등과...]]>
Mon, 15 Dec 2014 14:53:00 +0900
홍순권 <![CDATA[추월산성 전투와 기삼연의 죽음]]> 제16회 추월산성 전투와 기삼연의 죽음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신년 1월 하순 기삼연은 호남 일대에 배일격문을 돌리고 아울러 일본인 관민(官民)의 목에 현상금을 걸고 병사들과 주민들의 항일투쟁을 독려하였다. 그러나 한 겨울 추운 날씨에다 구정이 가까워 오면서 군사 활동이 한층 어렵게 되었다. 기삼연 또한 거동이 불편하였다.

그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새 은신처를 찾아 그 일생의 마지막 전장이 될 담양 추월산성으로 들어갔다. 성 주변 험한 산세가 믿을 만하여 이곳에서 설을 맞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밤이 깊어가자 뜻하지 않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노숙하는 병사들의 옷은 젖어 추위를 견딜 수가 없는데다 끼니조차 걸어 굶주린 상태였다.

이 때 수비의 허술함을 틈타 일병들이 기습 공격을 가해 왔다. 1908년 1월 29일 밤이었다. 일병들이 의병군을 바로 뒤따라 온 탓에 미처 싸움에 대비할 겨를 도 없었다. 공격을 시작한 적병들은 총을 요란하게 쏘아댔다. 의병군은 죽음을 무릅쓰고 힘을 다해 대항하였다. 전투는 밤새 계속되었다. 이때의 전황을 김용구의「의소일기」...]]>
Fri, 07 Nov 2014 14:52:00 +0900
홍순권 <![CDATA[의병투쟁의 확산과 일본군의 대응]]> 제15회 의병투쟁의 확산과 일본군의 대응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겨울에 접어들면서 기삼연은 광고문(격문)을 써 각 고을에 띄웠다.

<호남창의대장이 널리 각 고을에 고함>

이웃나라와 외교한다고 핑계하고 통상에 대한 방책이 없었던 것이 실로 화단이 되었다. 처음에는 음란하고 부정한 물건을 만들어서 우리 민속을 문란케 하고 마침내는 매국하는 무리에게 뇌물로 매수하여 백성과 사직에까지 가만히 옮기니 화의 근본이 끊어지질 않는다.

본 의소는 큰 일을 일으켜서 강토(국권)를 회복하기를 맹세하였으나, 병을 얻은 근원을 살펴서 명현(瞑眩 병이 치유될 때 일어나는 현기증 현상)이 일어날 정도의 약을 쓰지 않으면 한갓 군사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이에 화의 근본과 병의 근원 몇 가지를 대략 들어서 본 의소가 정한 일도양단의 방침을 통절히 보이노니, 각기 마음을 씻어 영을 따르라. 그렇지 않은 자에게 본 의소는 장차 형벌의 절차 없이 즉시 살육하여 후환 없는 법을 시행하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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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 16 Oct 2014 14:52:00 +0900
홍순권 <![CDATA[법성포, 장성 공격과 백양사 약사암 전투]]> 14회 법성포, 장성 공격과 백양사 약사암 전투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이남규를 체포한 일본군은 고창읍 점령을 보고 받고 출동한 고부수비대 제6중대 소속 스스무(進) 소위 이하 35명의 부대원이었다. 이들은 고창성을 점령 중이던 의병들이 자신들의 공격을 받고 퇴각을 결정하자, 퇴각하는 의병대원들을 추격하던 중 이남규를 체포하였다.

스스무 소위는 이남규를 심문한 결과 고창읍 내습 당시 의병의 총 병력은 50명이었고, 기삼연의 지휘 하에 이진사(이철형), 김유성, 이대극 등이 가담하였으며, 11월 1일 고창분파소를 습격하여 무기를 약탈하고 일본인 2명을 살해했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이남규는 그 날 밤 군아에서 잠을 자던 중 일본군의 습격을 받고 도주하던 중 성벽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해 체포되었던 것이다.주1)

주1) <진중일지> 1907년 11월 15일자「고부수비제6중대장 중원대위 보고의 요지」 참조. 또 <진중일지> 1907년 11월 12일자 전과 보고에 의하면 고창 전투에서 일본군은 적 2명을 죽이고, 10여명을 부...]]>
Mon, 06 Oct 2014 14:51:00 +0900
홍순권 <![CDATA[고창읍성 전투(1907년 10월 31일 - 11월 1일)]]> 제13회 고창읍성 전투(1907년 10월 31일~11월 1일)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문수사 전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인물이 있다. 김준(金準)이다. 김준의 자는 태원(泰元), 호는 죽봉(竹峰)으로 나주군 문평면 북동리 갈마지(渴馬池)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24세 되던 해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일시 동학농민군에 가담하기도 했었다. 을사늑약 이후 김돈(金燉) 등과 거의를 도모하던 중 기삼연의 거의 소식을 듣고, 동지 10여 명과 함께 문수사로 찾아갔다. 이 날 김준은 기삼연을 만나 허심탄회하게 장차 의병투쟁의 방략과 군무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그러던 중 가을비가 내리는 어둠을 틈타 몰래 잠입한 일병들의 기습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기삼연은 김용구, 김엽중(金燁中), 김익중(金翼中)으로 하여금 전투 준비에 나서게 했는데, 뜻밖에도 그 날 야간 전투에서 새로 찾아 온 김준이 큰 공을 세웠다. 갑작스런 적의 기습으로 의병들이 크게 당황하자 김준은 앞으로 나서며 다음과 같이 큰소리로 의병들을 고무시켰다.

“의병이라 이름하고서 적을...]]>
Mon, 06 Oct 2014 14:51:00 +0900
홍순권 <![CDATA[고창 문수사에 진을 치다]]> 제12회 고창 문수사에 진을 치다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장성 수연산에서 기삼연이 또 다시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 뜻 있는 선비와 우국지사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대한매일신보사 여러분에게>라는 글에서 기삼연이 밝힌 바로는 그가 수연산에서 거의한 날자는 정미년(1907) 음력 8월 9일(양력 9월 16일)이다.

그런데 후은(後隱) 김용구(金容球)가 쓴 <<의소일기>> 정미 8월 8일(음력) 기사에는 “성재와 함께 나라를 찾고 원수를 갚고자 동맹하여 거의할 것을 하늘과 땅에 고하고 피를 마셔 함께 맹세하였다”고 되어 있다. 김용구는 기삼연과의 약속에 따라 음력 8월 11일 영광에서 별도의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거의하였다.

이를 종합해 보면, 8월 9일 기삼연이 먼저 호남창의회맹소의 결성과 동시에 수연산에서 거의하고, 이어서 김용구가 영광으로 돌아가 8월 11일 별도의 의병부대를 조직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한 8월 9일 수연산에 모여...]]>
Mon, 18 Aug 2014 14:50:00 +0900
홍순권 <![CDATA[기삼연, 수연산 석수암에서 의병을 일으키다]]> 제11회 기삼연, 수연산 석수암에서 의병을 일으키다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기우만의 장성의병이 해산된 이후 기삼연은 장성에 은거하면서 새로운 기회를 엿보았다. 그는 1896년 장성 거의에 함께 참여했다가 흩어진 동지들과 뜻있는 인사들을 자주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여 시국에 관하여 의논하였다. 그러한 와중에 그의 집에는 화약을 구하는 사람, 실탄을 구하는 사람, 말, 창, 칼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졌다. 이를 눈치 챈 장성 관아에서는 기삼연에게 국법을 어기는 일은 하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하였다.

1902년 2월 8일은 기삼연의 막내딸이 시집가는 날로 하남 마을이 떠들썩하였다. 보룡산(步龍山) 중턱에 자리 잡은 기삼연의 집 큰 마당에는 널따란 차일이 쳐지고 많은 하객이 몰려들었다. 정오 쯤 신랑이 당도하여 대문 안으로 들어서고, 이제 막 혼례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대문 밖이 소란하더니 갑자기 진위대 군사가 기삼연의 집에 들이닥친 것이다. 군사를 지휘한 사람은 전주 진위대장 김한정(金漢鼎)으로 관찰사 조한국(趙漢國)의 명령을 받고 기삼연 선생을 모시러 왔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
Mon, 14 Jul 2014 14:49:00 +0900
홍순권 <![CDATA[내우외환에 휩싸인 고종의 꿈과 좌절]]> 제10회 내우회환에 휩싸인 고종의 꿈과 좌절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1896년 2월 아관파천 뒤 고종이 파견한 선유사의 회유로 각지의 의병부대들이 해산한 이후에도 고종의 환궁과 자주독립을 바라는 여론은 끓이지 않았다. 이러한 여론을 등에 업고 고종은 1897년 2월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로부터 6개월 뒤 연호를 광무로 정하고, 10월에는 원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자주독립을 선언한 고종의 신정부는 곧 이어 ‘옛것을 근본으로 하고 새로운 것을 참작한다.’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원칙을 내세워 이른바 ‘광무개혁’으로 불리는 새로운 개혁정책을 시행해 나갔다. 이는 외세의존적이었던 갑오정권의 개혁정책에 대한 반성에 토대를 두고 농민전쟁이나 의병운동에서 나타난 농민층과 척사파 유생들의 요구를 감안한 것이었다.

일본에 기대어 급격하게 추진한 갑오정권의 개혁 방식과는 달리 과거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서양의 법과 제도를 수용하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rsqu...]]>
Mon, 14 Jul 2014 14:48:00 +0900
홍순권 <![CDATA[노사의 가르침을 받은 백마장군, 기삼연]]> 제9회 노사의 가르침을 받은 백마장군, 기삼연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을미사변 이후 호남에서 의병운동에 앞장 선 인물이 기우만이었다면, 을사늑약 이후 호남지역 의병항쟁의 기폭제를 마련한 인물은 바로 기삼연(奇參衍)이었다.

장하도다 기삼연
제비같다 전해산
싸움 잘한다 김죽봉
잘도 죽인다 안담살이
되나 못되나 박포대

이 노래는 1907년 8월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당한 이후 호남지역에 불리어졌던 의병가로 당시 호남지역 의병항쟁의 실상을 반영하고 있다.주1)

주1) 이 노래는 1976년 12월 8일자 광주일보에 김동수가 쓴 의병열전에 실려 있다. 여기서 본명이 전수용인 해산(海山)은 기삼연이 일으킨 호남창의회맹소의 참모였고, 본명이 김준(金準)이고 자가 태원(泰元)인 죽봉(竹峰)은 호남창의회맹소의 선봉이었고, 안담살이 보성의 머슴 의병장 안규홍, 박포대의 본명은 박경래(朴慶來), 자는 도경(朴道京)로 그가 총을 잘 쏘았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Tue, 01 Jul 2014 14:43:00 +0900
홍순권 <![CDATA[호남유림의 영수 기우만, 망국의 한을 '호남의병열전'에 담다]]> 제8회 호남유림의 영수 기우만,
망국의 한을 ‘호남의병열전’에 담다.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기우만은 의병을 해산한 뒤 두 차례나 국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먼저 1906년 3월에 올린 상소에서는 단발령을 철회한 이후 애초에 단발을 주장했던 자들의 죄를 묻지 않은 것과 구제도를 복구하였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개화정책이 그대로 시행되고 있는 점을 비판하였다.

이와 더불어 의병을 일으킨 사람들을 처단하거나 체포하는 것과 자신에게 뜻밖의 누명을 씌워 체포령을 내린 것에 대해서 부당함과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기우만은 상소를 서울로 올라가 직접 전달하려 하였으나, 곳곳에 포교가 깔려 있어서 포기하고 말았다.

5월에 올린 두 번째 상소에서는 창의 전후로 세 번이나 올린 소장에 대한 비답(批答)이 없는 것은 언로가 막힌 탓임을 비판하면서, 창의의 정당성을 재차 밝혔다. 그러나 이 상소의 말미에 기우만은 간신이 전횡하여 충성을 바치려 해도 바칠 길이 없으므로 임금이 환궁하기를 기다리며,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산으로 들어가 ...]]>
Thu, 19 Jun 2014 14:42:00 +0900
홍순권 <![CDATA[장성에서 거의한 기우만, 나주에서 호남대의소를 창설하고 광주향교 광산관에 집결하다]]> 제7회 장성에서 거의한 기우만,
나주에서 호남대의소를 창설하고 광주향교 광산관에 집결하다.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1986년 2월 장성에서 기우만 등이 창의할 무렵 나주에서도 의병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왕비시해 사건과 단발령으로 반일 감정이 한층 고조되어 있던 터에 나주관찰부 참서관(參書官)주1)으로 있던 안종수(安宗洙)의 주도하에 개화파 관료들이 순검을 동원하여 성내 주민들의 상투를 강제로 잘라내자, 양반 유생은 물론 민중과 이속들의 불만이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주1) 참서관은 1895년 내정개혁의 일환으로 추진된 지방제도 개혁에 따라 동년 윤 5월 1일부터 23부제가 실시되면서 신설된 직제이다. 각 부의 장관으로 관찰사를 두었는데, 참서관은 부 관찰사 다음 서열로 부관찰사(副觀察使)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23부제는 1년만인 1896년 8월(양력)에 폐지되었고, 8도를 조금 보완한 13도 체제로 행정구역을 다시 재편되었다.

바로 이 때 장성의 기우만이 각 고을로 보낸 격문과 홍주의 통문이 도착하자, 나주의 유생과...]]>
Thu, 19 Jun 2014 14:41:00 +0900
홍순권 <![CDATA[기우만,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키다]]> 제6회 기우만,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키다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기우만은 1846년(헌종 12년) 8월 장성군 탁곡(卓谷; 현 황룡면 아곡리)에서 태어났다. 기우만은 여덟살 때 중국 초나라 때 제갈량이 쓴 출사표 같은 어려운 고문을 이해했으며, 열세살 때는 자치통감과 주자강목을, 그리고 16살 때에는 주역, 예기, 춘추 등을 독파했다고 한다.

기우만은 25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29세 때 증광과(문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이후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가 살았던 곳이 황룡면 하사촌(下沙村)이었는데, 30세 때 고진원(古珍原)의 창촌(倉村)으로 이사했다가 다시 진원면 월송리(月松里)으로 이사하면서 호를 송사(松沙)라고 지었다. 하사와 월송에서 한자씩 따서 지은 것이다.

그의 나이 34세 때인 1879년 조부 노사 기정진이 별세하였다. 기정진이 타계하자 그는 승중손(承重孫)인 춘도(春度)를 대신하여 상(喪)을 주관하였다. 2년 뒤 1881년 여름에 조부 기정진의 유문(遺文)을 편사(編寫)하였고, 1883년 봄...]]>
Mon, 09 Jun 2014 14:40:00 +0900